"비평가의 본분은 작품을 잘 읽어주는 일이라 봐요. 작품이 지닌 풍부한 의미를 전문적 지식ㆍ관점을 통해 밝힘으로써 작가와 독자간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죠. 비평가가 역사 의식, 도덕성 운운하며 작가들을 장악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 드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제19회 팔봉비평문학상 수상자 박혜경(48)씨는 "비평가는 작가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라고까지 말한다. 작가의 예술적 재능에 경의를 표하고 문학적 가능성을 발굴해서 보여주는 '공감의 비평'이 문학비평이 나아갈 바라는 것. 수상작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 는 박씨가 고수해온 이런 비평관이 농익은 시선과 문장으로 구현된 역작이다. 오르페우스의>
책 서문에서 박씨는 오르페우스와 오디세우스를 대비한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치명적 유혹을 견뎌내고 금의환향하지만, 오르페우스는 신과의 약속을 어김으로써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와 영원히 이별하고 만다. 박씨는 둘의 어긋난 운명을 이렇게 정리한다. "유혹을 이긴 자는 영웅이 되고, 유혹을 이기지 못한 자는 시인이 된다."
이 간명한 문장이 박씨의 비평관, 나아가 문학관을 관통한다. 그는 "문학은 대사회적 영향력을 꾀하는 자리가 아닌,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픈 내밀한 욕망에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문학이, 영원히 잃어버린 에우리디케의 빈자리를 찾아 헤매는 오르페우스의 하프 소리 같은 것이라면, 비평가가 작품을 통해 추적해가야 할 곳 역시 작가 내면에 터잡은 상실의 지점이리라. 그래서 박씨의 비평글은 작품 텍스트를 질기게 파고 들어가서 그 결을, 그 결 속의 비의(秘意)를 세심하게 펼친다.
첫 여성 수상자다. 박씨가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할 때, 그에게 당선 통보 전화를 한 여기자는 "엇, 여자분이세요?"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박혜경'이란 이름의 응모자가 남성으로 여겨질리 만무하건만, 그만큼 평론은 으레 남성 몫이란 통념이 강했던 것.
강인숙(75)씨를 비롯한 소수의 대선배를 제외한다면, 현재 비평계의 주도권을 쥔 여성평론가 그룹이 문단에 나오는 90년대 중반까지 박씨는 7, 8년간 평단의 '홍일점'으로 고군분투했다. 96년 문예지(<문학과사회> ) 편집위원이 된 것도 여성 최초다. 문학과사회>
작가의 이념을 문제삼는 리얼리즘 비평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등단 초부터 박씨는 텍스트를 섬세하게 읽어내는 공감의 비평을 개진했다. 특히 신경숙씨를 위시해 90년대 대거 등장한 여성 작가들의 독특한 감수성을 읽어내는데 있어 박씨의 비평은 더욱 빛을 발했다.
이번 수상작에도 강력히 피력했지만, 작가가 독자에게 혹은 비평가가 작가에게 뭔가 가르치려 드는 도덕적 계몽주의가 한국문학의 상상력을 위축시켜 '뻔한' 작품만 양산시켰다는 것이 박씨의 지론이다. 그 계몽주의는 역사의식ㆍ사실주의에 대한 강조와 짝패를 이룬다. "2000년대 문학의 위기는 실상 리얼리즘의 위기 아닐까.
오늘날 작가들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식 없이 제각기 개성적인 문학을 펼치고 있다. 굉장히 긍정적이라고 본다." 박씨의 향후 계획 중 하나는 이제하ㆍ이인성씨부터 2000년대 작가까지 아울러 그간 한국문학 언저리에 소외돼온 환상성ㆍ초월성의 상상력을 제시하는 일이다.
박씨는 한국문학의 미래가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독자 수가 줄어드는 것은 부정 못할 사실이다. 하지만 문학은 원래 고독한 것 아닌가. 문학이 대사회적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믿음은 지나친 환상이다.
문학적인 것의 요구는 꾸준히 있을 테고, 더군다나 빠른 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슬로 미디어(slow media)인 문학의 가치가 새삼스러워질 테다."
7년 동안 열심히 시(詩)를 썼다고, 박씨는 20대 학창 시절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에게 문학의 길을 열어준 것은 평론이었다. 그래도 당시 습작 시절이 있어서 작품을 좀더 가까운 자리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수상작엔 이런 구절이 있다. "심연의 상상력은 해답을 미리 정해 놓고 시작하는 모험이 아니라, 영원히 해답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끌어안고 시작하는 정신의 모험이다."(108쪽) 조금 뒤엔 이런 구절이 있다.
"좋은 문학은 바로 그러한 정신적 모험의 역동적 긴장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119쪽) '심연의 상상력'으로 탄생하는 '좋은 문학', 이 비평의 에우리디케를 구하려는 박씨의 하프 연주는 계속된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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