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은 박경리씨의 타계 소식에 “거목이 쓰러졌다”고 애도하며 생전의 그에 대한 추억과 인연을 되새기고 있다.
평론가 김병익(70)씨는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시절 고인과의 첫 인연을 회고했다. 1973년 나온 <토지> 1부를 인상깊게 읽고 작가를 만나고픈 마음에 김씨는 정릉 자택을 찾았다. “딸이 나와서 어머니가 안 계시다고 하기에, 거짓말이란 걸 빤히 눈치 채고도 일단 돌아왔다. 워낙 인터뷰를 꺼린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다음날 다시 찾아갔지만 역시 문전박대를 당한 김씨는,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원고지 10장이 넘는 긴 서평기사를 썼다. “나중에 들었는데 선생이 당시 나온 비평글 중에 내 기사가 제일 좋았다고 하더라. 그게 계기가 돼서 서로 친해졌다.” 토지>
곁눈질 없이 오직 창작에 헌신했던 박씨의 깐깐한 면모는 김윤식(72) 명지대 석좌교수의 전언에서도 확인된다. “소설가 정한숙씨가 예술원 회장일 때 박 선생을 회원으로 맞아들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선생과 절친한 여작가 강신재씨까지 동원해서 끈질기게 설득한 모양인데, 선생은 재고의 여지도 없이 거절했다고 하더라.”
김병익씨는 박씨가 74년 동아일보에 장편 <단층> 을 연재할 때 문학 담당 기자이기도 했다. 그 해는 박씨의 사위 김지하씨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소돼 6년 넘게 이어질 옥고를 치르기 시작한 해였다. “집안 사정이 그렇다보니 제대로 마감을 할 수가 있나. 몸이 달아 정릉 집으로 원고를 받으러 가면 딸은 서대문형무소에 있는 남편 살피러 집을 비웠고, 박씨가 손자를 업고 어르고 있곤 했다. 참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을 것이다.” 단층>
이근배(68) 시인은 자신이 주간을 맡았던 문학잡지 ‘한국문학’에 <토지> 3부를 연재했던 때를 떠올렸다. “인터넷도 팩스도 없을 때니까 정릉 댁에 가서 원고를 받아오곤 했다. 늘 마감시간을 어기지 않고 단정한 모습으로 원고를 내어주셨다. 담배는 좋아하셨지만 약주를 드시거나 여행 같이 사람들과 어울려 하는 일은 그리 즐기지 않으셨다. 작가로서 한창 물오른 시기를 철저히 <토지> 집필에 투입하셨다. 시쳇말로 ‘올인’을 하신 것이다.” 이 시인은 박씨가 문학적 스승인 김동리에게 한결같이 깎듯했다고도 돌이켰다. 70년대 동리가 문단 한쪽에서 보수적 작가로 질타를 받을 때도 늘 존경의 태도를 지켰고, 최근까지도 추모행사에 참석해 왔다는 것. 토지> 토지>
소설가 김훈(60)씨는 신참 한국일보 기자 시절이던 1975년 2월 15일 영등포교도소 앞에서 박씨와 조우했던 일을 회고했다. 김지하씨가 형 집행정지로 출감(김씨는 이듬해 다시 수감됐다)하는 것을 취재하다, 추운 겨울밤 돌바기 손자를 업고 사위를 맞으러 온 박씨의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선생의 모습을 훔쳐보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선생의 등에 매달린 아이가 발이 시려우면 안될 텐데 하는 걱정을 했고, 그때 내 마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울음에 가까운 따뜻한 것들이 돋아남을 느꼈다. 지금 와서 겨우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따뜻함의 정체는 박경리 선생의 모성이었다.”
이훈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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