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사전 수록 대상 인사 2차 명단을 발표한 이후 다시 논란이 뜨겁다. 여러 차례 되풀이된 이런 논란을 보면 한 가지 특이한 공통점이 눈에 띈다. 사전 편찬 반대 편에 선 토론자들은 하나같이 이런 말로 시작한다. “친일 청산 작업이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말이다.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친일파 분류 기준이 너무 자의적이다.” 그럼, 좀더 타당한 기준을 제시해 달라고 하면 “식민지가 엄혹한 시절이었음을 고려할 때 개인의 행위를 한 가지 잣대로 재단할 수는 없다”고 한다.
■친일파니 뭐니 따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결국 따지지 말자는 얘기다. 이런 스타일도 있다. “공과 과를 아울러 균형 있게 봐야 한다.” 공은 이미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이제 감춰졌던 과를 밝히자는 것인데, 뜬금없이 원론으로 돌아간다. 역시 하지 말자는 얘기를 좀 점잖게 하는 방식이다.
또 이런다. “일제 때 친일 안 한 사람 어디 있나. 친일과 반일을 이분법으로 갈라서 미래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서 친일 안 하고 독립운동 하느라 죽을 고비 넘긴 사람 많다.
■일제의 압제 속에서 힘겹게 평범한 삶을 살아간 대다수 사람들에게 막무가내로 이분법을 들이대는 무뢰배는 또 누가 있던가? 이런 스타일도 있다. “그렇게 까발리면 남아날 사람 누가 있느냐?” 많다.
이제부터 발굴해야 할 분들도 많다. 그리고, 인생의 한 시기에 친일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앞과 뒤 모든 것을 깡그리 부정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친일파였지만 훌륭한 예술가도 있고, 친일파에 좌파에 독재자였지만 한강의 기적을 이끈 인물도 있다. “당신은 일제 때 살아보고 하는 얘기인가?”하는 식의 반론에 이르면 어안이 벙벙하다.
■이순신 장군을 꼭 곁에서 꼭 모셔봐야만 아나? 무지가 아니라면 ‘안 살아 봐서 알 수 없으니 말하지 말라’는 얕은 술수다. “친일파 청산하자는 자들은 다 빨갱이다”라는 폭언에 이르면 광복회 할아버지들 뵐 면목이 없다.
처음부터 좀 솔직하고 분명하게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친일파 청산이 싫다”고. 그럼 제대로 반론할 수 있겠다. 정의와 불의가 무엇인지, 선과 악이 무엇인지 최소한의 현실적 구분조차 할 수 없고, 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에는 정말 미래가 없다. 역사에서 망각과 묵인은 용서가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죄악이라고.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