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이 낳은 '신비'가 없다면 사랑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모름지기'는 '마땅히', '응당'이라는 뜻이다. 의무와 당위의 부사랄 수 있다. 그 15세기 형태는 '모로매'다. 한자 須(수)나 必(필)에 대응했다. 그 두 자를 잇댄 필수(必須)는 '반드시 있어야 함', '꼭 필요함'이라는 뜻이다. '필수과목'이나 '필수조건', '필수 아미노산'에서처럼.
한자 수(須)는 다의자(多義字)다. 수지(須知: 마땅히 알아야 할 일)에서는 '모름지기'의 뜻이지만, 수유(須臾: 아주 짧은 시간)에서는 '잠깐'이라는 뜻이고, 수발(須髮: 수염과 머리털)에서는 턱수염이라는 뜻이다.
수(須)는 얼굴(頁)과 털(彡)을 합해 만든 글자이므로, 그 본디뜻은 턱수염이다. '턱수염'에서 '잠깐'으로, 거기서 다시 '모름지기'로 나아간 상상력의 발걸음이 참 재기도 하다.
'마땅히' 같은 의무·당위의 부사
중세 한국어 '모로매'는 '모롬애', '모로미', '모롬이', '모름이', '모롬즉' 따위로 그 형태와 철자를 바꿔오다가, 마침내 '모름지기'에 이르렀다. 이 부사의 뿌리가 동사 '모르다'에 있음은 한 눈에 또렷하다. 그러니까 '모로매'나 그 최종 진화형인 '모름지기'는 어원적으로 '모르긴 몰라도', '모르는 즉(모르니)'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로매/ 모름지기'가 '모르긴 몰라도'와 같은 값을 지닌 것은 아니다. ('모르니'와는 더욱더 그렇다.) '모르긴 몰라도'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개연성이 크다는 것을 뜻하니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추정법 서술어 형태와 호응한다. 예컨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모르긴 몰라도 성욕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을 거야"에서처럼.
'모름지기'는 '모르면 몰라도'보다 단정의 정도가 한결 더 크다. 올바로 얘기하자면, 단정의 정도가 아니라 강제의 정도라 해야 할 테다. 다른 당위성 부사어들처럼, '모름지기'도 주로 동사나 존재사('있다')와 친하게 어울려 다닐 뿐 형용사나 지정사('이다')와는 사이가 데면데면한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가 모든 범주의 용언하고 두루 어울리는 것과는 두드러진 차이다. 그러니까 '모르긴 몰라도'와 '모름지기'는 의미 층위에서만이 아니라 통사 층위에서도 꽤 거리가 있는 말이다.
'모름지기'는 '굳이 (이유를) 알(려고 할) 것[필요]도 없이 무조건'이라는 뜻이다. '모름지기'의 세계는 의심이나 회의로 이어지는 이성이나 합리성을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부사는 당위보조동사 '(-어야) 하다' '(-어야) 되다'나 당위를 나타내는 어미들과 호응한다.
"앎은 모름지기 귀납법에 바탕을 두어야 해!"라거나 "지어미는 모름지기 지아비의 뜻을 따를지니라"(바라건대 이 예문의 내용적 봉건성을 용서하시라)에서처럼. '모름지기'의 세계는 꼼꼼히 따져보는 것을 금하는 위압으로 채워져 있다. "왜냐고? 모르니까!", "모르는 게 좋아! 알면 다쳐!"가 이 세계의 금언이다.
한국어에선 '모르다'와 '알다'가 균형 잡힌 대칭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난 사랑이 뭔지 알아!"와 반의적 서술 대칭을 이루는 문장은 "난 사랑이 뭔지 몰라!"다. 그러나 영어에는 '모르다'에 해당하는 동사가 없다. 영어 화자들은 그저 '알지 못 한다(do not know)'고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I know what love is"와 반의적 서술 대칭을 이루는 문장은 "I don't know what love is"다. 통사 층위에서 '알다'를 부정함으로써만 '모르다'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모름을 이와 달리 표현하는 "I'm unaware of it"나 "I've no idea" 같은 문장에도 부정(否定)을 드러내는 형태소가 또렷하다.
'알다' 앞에 부정형태소가 붙어
프랑스어(ignorer)나 스페인어(ignorar) 같은 로망어(통속 라틴어가 진화해 생긴 언어들)에는 '모르다'에 해당하는 동사가 있지만, 그 레지스터(域)가 다르다. 프랑스어 '이뇨레'나 스페인어 '이그노라르'는 한국어 '모르다'보다 무거운 말이다. 문어(文語) 태가 살짝 난다는 뜻이다.
'모르다'와 레지스터를 맞추려면, 로망어에서도 '알지 못 한다'(프랑스어라면 ne pas savoir, 스페인어라면 no saber)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영어처럼 통사 층위에서 '알다'를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어에서 '모름'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특권의 기원은 그리 특권적이지 않다. 모르긴 몰라도, '모르다' 역시 '알다' 앞에 부정(否定) 형태소 '못(??)'이 덧붙어 생겨난 말일 개연성이 꽤 높으니 말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모르다'는 의미적으로만이 아니라 형태적으로도 '못(cannot) 안다(know)'는 말이다.
'??'의 마지막 자음 /ㄷ/이 /ᄅ/로 변했다 보는 것이다. /ᄃ/과 /ᄅ/의 넘나듦은 한국어에 흔하다. '일컫다' '깨닫다' '걷다' '듣다' '겯다' '긷다' '싣다' '묻다(問)' 같은 'ᄃ' 불규칙 동사들이 그렇고, 한 술 밥의 '술'과 숟가락의 '숟'이 그렇다.
'모르다'와 개념적 의미가 포개지는 프랑스어 '이뇨레'나 스페인어 '이그노라르'도 어원적으로 '알다' 앞에 부정형태소가 덧붙은 말이다. 이 말들은 같은 뜻의 라틴어 동사 '이그노라레(ignorare)'를 차용한 것이고 '이그노라레'는 '무지(無知)하다'는 뜻의 형용사 '이그나루스(ignarus)'의 파생어다.
그런데 '이그나루스'는 '알고 있는'이라는 뜻의 '그나루스(gnarus)'에 부정의 접두사 '이(i-)'(본디는 '인' in-)가 덧붙은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호모 사피엔스가 언어를 막 만들어낼 무렵부터, '모른다'는 개념은 뇌 속에 직접 들어오기보다 '알다'를 부정함으로써 에돌아 들어온 모양이다.
'앎'을 향한 욕망은 인간의 본성
앎을 향한 욕망은 태곳적부터 호모 사피엔스를 다른 동물과 가르는 본성으로 간주돼 왔다. 그 욕망에 올라타, 인간은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국의 속담 하나는 "모르면 약이요, 아는 게 병"이라 말한다.
'아는 게 병'이라고 할 때의 앎은 덜 익은 앎, 참에 이르지 못한 앎일 수도 있겠지만(선무당이 사람 죽인다!), 어느 땐 앎 자체가(설령 그것이 참된 앎이라 할지라도!) 병이 되고 탈이 되기도 한다.
비속한 예로, 제 연인의 옛 연인(들)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탈이 되기 십상이다. 그 앎은 세속적 사랑의 가장 격정적 부분인 질투를 활활 타오르게 할 수도 있고, 제 연인의 '순애'에 대한 불신을 불러올 수도 있다.
이름값 하는 사랑이라면 연인의 과거사에 모름지기 대범해야 하는 법이겠으나, 세상의 모든 사랑이 이름값 하는 사랑일 수는 없다. 이럴 땐 그야말로 모르는 게 약이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현상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래와 이야기가 발명된 이래 예술의 마르지 않는 샘 노릇을 했던 낭만적 사랑의 아우라는, 인간의 앎이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이제 거의 걷혔다.
적잖은 사람들이 연애감정이라는 것은 자연(유전자)이 번식을 위해 우리 몸을 조종해 만들어내는 격렬한 심리상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은행나무에도 연애감정이 있을까?)
생명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유럽 고전어에서 기원한 이런저런 호르몬 이름과 신경전달물질 이름을 입에 올리며 '위대한 사랑들의 고귀한 연분'을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생각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도, 아사달과 아사녀도, 성춘향과 이몽룡도, 윤심덕과 김우진도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에 휘둘렸을 뿐이다. 자식을 낳았든 그렇지 않았든, 그들의 사랑은 유전자를 퍼뜨리는 '작업'이었을 뿐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의 사랑에서는 힘이 많이 빠질 것이다. 신비가 없다면 사랑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사랑을 지속시키는 힘 하나는 모름이다. 모름은 신비를 낳고, 신비는 사랑을 낳는다. 사랑의 언어는 뜻 모를 소리(여야 하)고, 사랑의 행동은 뜻 모를 행동이(어야 한)다.
설령 알게 됐을 때도 모르는 척하는 것, 모르쇠로 덮어두는 게 사랑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사랑을 진짜 아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에는 성과 생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랑이다.
사랑의 이유를 꼭 알아야 하나
사랑은 추상명사이면서 심리동사이면서 양태부사다. 양태부사 가운데서도 당위부사다. 곧 '모름지기'와 동의어다. 사랑의 기원과 목적과 이유를 알려고 애쓰지 말자. 사랑은 모름지기 모름 속에 있어야 할지니. 왜냐고? 모르니까. 모로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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