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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책, 말랑말랑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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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책, 말랑말랑한 힘

입력
2008.05.06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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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불황에 허덕이는 영화계에 한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은 중화주의를 담은 중국 블록버스터의 양산이다. ‘삼국지:용의 부활’과 ‘명장’, ‘연의 황후’ ‘집결호’가 개봉했고, 베이징올림픽 개막 때쯤 ‘적벽대전’이 흥행몰이에 나선다. 속이 뻔히 보이는 내용이라 관객들이 외면했지만 트렌드 만큼은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문화쪽 일을 담당하다 보니 ‘소프트 차이나(Soft China)’ 를 향해 줄달음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눈에 보일 듯 느껴진다. 그리고 그 숨결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양상이다. 중국 유학생들의 성화봉송 폭력사태도 소프트 차이나에 대한 열망의 왜곡된 표현이 아니던가.

중국의 소프트 파워의 진원지는 출판분야다. 중국 소설과 인문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번역돼 쏟아진다. 위화, 쑤퉁, 이중톈 같은 이름은 우리 독자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중국출판연감에 따르면 개혁개방 이후 20년 동안 출판사는 6배, 출판종수는 16배나 뛰었다. 14일부터 열리는 ‘서울국제도서전’에 처음 도입된 주빈국에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중국이 선정된 것은 중국 출판의 힘이 국제적으로 인정 받았음을 의미한다.

더욱 두려운 것은 중국에서 가장 많이 출간된 분야와 베스트셀러에 중국 전통문화를 강조하는 인문서가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이건웅 차이나하우스 대표는 출판잡지인 ‘기획회의’ 최근호에 기고한 글에서 ‘삼국지’와 ‘공자’가 그 중심에 서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 ‘위대한 중국’ ‘강한 중국’ 을 전세계에 알리자는 의도라는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눈을 안으로 돌려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소프트 코리아’는커녕 기본적인 문화적 소양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우려를 자아낸다. 국민 4명 중 한 명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고, 1인당 평균 독서량은 한 달에 한 권에도 못 미친다.

도서관 없는 학교가 20%에 이르고 그나마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은 수험생들의 공부방으로 둔갑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책 읽은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남녀를 불문하고 휴대폰으로 드라마, 게임이나 보고 ‘문자질’에만 열중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문화강국’이니, ‘문화선진국’이니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가 나오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인문학과 인문서의 몰락이다.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 철학 등 인문학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고, 영국에서는 신입사원 선발에서 철학 전공자들이 우대 받는다는 가디언 지의 보도도 있었다. 반면에 우리는 실용과 시장 경쟁력을 추구하는 데만 온 국가가 관심이 쏠려있다.

전통적으로 책을 잘 읽지 않는 보수층이 정권을 잡은 데다 실용만 강조하는 풍토가 악영향을 미칠 거라는 웃지 못할 얘기마저 출판계에 나돈다.

국가 경쟁력과 성장 동력은 책에서 나오는데 도대체 우리는 미래를 보는 안목과 혜안, 통찰력을 어디서 얻으려 하는가. 경제가 어렵다고 독서까지 하지 않으면 영원히 문화 후진국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화창한 봄을 맞아 다양한 책 잔치가 여기저기서 펼쳐지고 있다. 파주 어린이책잔치와 남이섬 세계책나라축제가 개막됐고, 2008서울국제도서전이 ‘책의 길, 공존의 길’이라는 주제로 다음주 열린다. 모처럼 어린이들 손을 잡고 책을 가까이 하는 기회를 갖는 것은 어떨까. 나라의 장래를 조금이라도 걱정한다면 말이다.

이충재ㆍ부국장 겸 문화부장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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