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여백이 필요하다. 하루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느라 남생이 목이 된 남성들, 팍팍한 도시의 삶에 피부가 거칠어져만 가는 여성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건 목 안마나 영양크림이 아니라, 지친 심신을 부려놓을 작은 안식이다.
도시에서 그 여백을 만들어주는 곳의 하나가 카페다. 분 단위로 쪼개 써야 하는 시간의 틈새, 차 한 잔의 여유는 열대의 휴양지에서 받는 전신마사지 부럽지않다.
이제 그 '한 잔의 여유'가 어두운 실내에서 햇볕 속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먼 유럽의 풍경이 아니라 한국의 도심에도 늘어나고 있는 노천 카페들, 이번 주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스무살 무렵엔 누구나 이런 로망을 꿈꾼다. #1. 스메타나의 음악이 일렁이는 오월의 프라하 거리. 블타바 강의 물결을 바라보며 보헤미아 맥주의 알싸한 맛에 탐닉한다. 저녁 노을이 카를 다리를 물들일 무렵, 카프카의 절망은 이미 내것이 되어 있다.
#2. 볕이 바스락거리는 유월의 런던. 100년도 더 된 자연석 블록을 밟으며 트라팔가 광장의 그늘에 발을 멈춘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이스트 앵글리아의 억센 악센트를 즐기며 도자기 잔에 담긴 가벼운 다즐링 향기를 빨아들인다.
교과서에서 봤던 19세기 회화부터 선배들의 배낭여행 무용담까지, 유럽의 낭만은 노천 카페의 느긋한 분위기에 실려 젊음을 유혹했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부모님을 졸라 20대가 가기 전에 그 느긋함에 몸을 담가 보는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른을 넘기고 마흔줄에 접어들면서 그런 낭만은 비현실적인 감촉으로 기억될 뿐이다. 가질 수 없는 여유이기에 노천 카페의 매력은 더 절절하다.
그 추억의 느긋함이 도시인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청계천변이나 홍대앞, 신사동 가로수길, 분당 정자동 골목.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번들거리는 쇼윈도가 대오를 이루던 빌딩 저층부에 이국적 분위기를 풍기는 노천 카페들이 테라스와 테라스를 맞대고 있다.
에어컨 바람 시원한 조용한 실내를 제쳐두고 카페마다 야외 테라스부터 자리가 채워진다. 야외 테라스에서 무릎담요를 덮고 책을 읽거나, 열심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거나, 쉬지 않고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서울 속에서 유럽의 풍경을 빚어낸다.
노천 카페의 증가는 여유를 갈망하는 도시인들의 내면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햇볕을 쬐며 차를 마시는 행위가 '사치'에서 '선망'을 거쳐 '향유'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내 교외로 나갈 수는 없지만 가까운 곳에서라도 여유를 느끼고 싶은 열망이 도심에 색색의 파라솔을 펼친 테이블을 늘어놓고 있다. '섹스&시티' 등의 드라마를 통해 노천 카페가 스타일리시하고 자유로운 여피족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것도 한몫했다.
사실 도심의 노천 카페는 휴식에 최적화된 공간은 아니다. 자동차가 뿜어내는 소음과 매연, 바삐 지나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시선, 파란 하늘보다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해버리는 빌딩숲 등등, 우리 도심의 노천 카페는 쾌적함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그곳을 찾는 것은 '햇빛 속의 여유'에 도시인들이 그만큼 목말라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아니다.
노천 카페의 발달은 메뉴의 변화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끓이고 마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종류의 커피와 홍차류가 메뉴판에 속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우스와인도 웬만한 카페의 메뉴에서 빠지지 않는다. 모두 시간과 여유, 그리고 길 가는 이들의 시선까지 고려한 음료들이다.
번다한 세상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도심의 노천 카페지만 그래도 그곳에 앉으면 세상 풍경이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속 시간처럼, 낯설게 흘러가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유상호기자 shy@hk.co.kr강명석 객원기자 lennoneh@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 카페의 진화… 지금은 복합문화공간
카페의 1차적인 존재이유는 '커피나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의 제공'이다. 그래서 카페 주인은 맛있는 차를 잘 만들어서 손님에게 서비스하는 데 제일 공을 들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카페를 찾는 손님은 그렇다고 차만 마시기 위해 찾아오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고 혹은 자투리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도 찾는다. 시대에 따라 카페도 그 이름부터 외형, 그리고 주된 역할이 변화해 왔다.
문화사랑방 역할 했던 음악다방
1970년대 그리고 80년대 중반까지의 카페는 대중문화를 접하는 일종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특히 컬러TV가 보급되기 전인 70년대에는 디스크자키(DJㆍ디제이)가 안이 들여다 보이게 유리로 만든 음악실에 앉아 손님의 신청곡을 LP로 틀어주는 이른바 음악다방이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서울 무교동의 '약속다방', 명동의 '꽃다방', 종로의 '양지다방', 연대 앞 '독수리다방', 종로2가의 '무화'와 '르네상스', 이대 앞 '사계절' 등이 이름을 날렸다. 젊은이들은 거기서 팝송을 신청해 듣고 미팅을 했다.
음악평론가 임진모씨는 "음악다방은 대중이 가장 근거리에서 엔터테인먼트를 만끽할 수 있는 장소였고, 그런 점에서 디제이는 최고의 연예인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며 "특히 지방의 음악다방에선 서울 무대에 진출하기 힘든 뮤지션들이 라이브 공연을 많이 해 팝 문화를 전달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봐도 된다"고 말했다.
음악다방은 콤팩트디스크(CD)가 보편화하고, 이문세 변진섭 등의 발라드 가요가 강세를 보인 시기와 맞물리는 80년대말부터 서서히 사양길에 들었다. 굳이 다방에서 디제이가 틀어주는 팝송을 들을 것 없이 어디서나 손쉽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음악다방은 떠나는 손님들을 잡기 위해 디스코다방, 클래식다방 등으로 특화하고 대형TV를 들여놓는 등 노력을 했지만 시대의 변화는 저만치 앞서 나갔다.
21세기, 복합적 문화공간으로 진화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다방 커피'는 사라져갔고, 카페에서는 원두를 핸드드립으로 만드는 고급 커피와 헤이즐넛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향커피가 주메뉴로 등장했다. 카페 자체도 점차 사교의 공간이기보다는 비즈니스를 위한 장소, 혹은 혼자서 차를 즐기는 곳으로 변화한다.
커피방앗간 이경환 사장은 "스타벅스 등 대형 커피전문점이 벤처 붐과 함께 급속히 유입되고, 이런 외국계 커피점의 성공을 보고 수많은 독자적인 커피전문점들이 생겨난 게 90년대 카페의 트렌드였다"고 말한다.
커피전문점의 활황 이후 2000년대의 카페는 요식업체라기보다 복합적인 문화공간의 하나로 진화하고 있다. 불황으로 소비자들의 지갑이 닫히면서 카페들도 차만 팔아서는 돈을 벌기 힘들어졌기 때문. 북카페, 장난감카페, 애견카페, 사주카페 등 각종 이색 카페가 등장하면서 단편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과거의 카페는 사라져가고 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 그곳에 가면 팍팍한 일상 잠시 뒤로 느긋한 자유 내 곁으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일상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는 공간에서 느긋하게 들이켜는 커피 한 잔의 여유. 노천카페의 참맛이다. 인터넷 음식전문 사이트 메뉴판닷컴과 여행정보 사이트 윙버스의 도움으로, 서울을 대표하는 카페 거리의 근사한 노천카페들을 소개한다.
■ 화랑의 품격이 마당 안에 - 인사동
전통과 예술의 품격이 살아있는 인사동에는 화랑을 겸한 카페가 적지 않다. 관훈갤러리 안에 위치한 ‘분더바(Wunder-Bar)’는 인사동 식 노천카페 문화를 대표한다. 분더(Wunder)는 독일어로 기적 또는 놀라움이라는 뜻.
도심 한복판에 있어도 바깥 세상과는 별개의 시간구조를 지닌 듯한 인사동의 고요함이 배어있는 게 매력 포인트. 낮보다는 밤의 운치가 더할 나위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인사동 수도약국 건너편 골목으로 50m 가량 직진해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쌉쌀한 원두의 맛이 그만인 모카치노 커피와 다크 초콜릿의 조합이 일품. (02)733-6469
■ 전통의 그윽함을 마신다 - 성북동
키 작은 한옥들에 카페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종로구 삼청동은 30~40대의 인기를 끌고 있는 곳. 삼청동이 최근 카페 문화의 신주류로 떠오른 곳이라면, 이웃한 성북동은 여전히 아는 이만 즐겨 찾는 카페의 은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유명세에선 밀리지만 전통의 주거지역과 어우러진 근사한 카페들이 여럿 있다.
‘수연산방’은 소설가 이태준 선생의 고택을 개조한 찻집으로 성북동 카페를 대표한다. 돌담으로 이어진 대문부터 옛 한옥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노천카페라기보다는 ‘마당 카페’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곳.
고풍스러운 모습이 시사하듯 전통차가 주력 메뉴다. 단골들이 즐겨 찾는 차는 ‘송차’. 솔방울을 달인 물과 미량의 술이 그윽한 향기를 빚어낸다. 비 오는 날 사랑채에 앉아 뜰을 내다보며 마시는 차 맛은 일품이다. 삼청터널을 지나 성북동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있는 성북2동 주민센터 옆에 위치하고 있다. (02)764-1736
■ 젊음의 풋풋함이 가득 - 홍익대 앞
10여년 전부터 ‘청춘의 거리’로 통하는 홍대 앞도 카페 문화의 한 축을 이룬다. 클럽의 역동성이 이 거리의 밤을 지배한다면, 노천 카페의 평화로움은 이곳의 낮을 상징한다. 유럽에서나 봄직한 카페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최근 이 거리를 즐겨 찾는 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카페는 ‘405 키친’. 홍대 앞 카페들의 장점을 한 곳에 모아놓은 것 같다는 평을 듣는다. 햇살이 풍요롭게 비치는 테라스와 편안한 의자가 배치된 실내 공간,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눈을 사로잡는 주방이 매력적이다.
즉석에서 갈아주는 오렌지에이드가 최고 인기 상품. 샌드위치 맛도 주변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평이다. (02)332-3949
■ 최신 트렌드의 상징 ‘가로수길’ - 신사동
트렌드의 진원지인 강남. 2000년대 초반에는 청담동, 중반에는 도산공원 앞길이 최신 유행의 분출구 역할을 했다면 강남의 요즘 화두는 신사동 ‘가로수길’이다.
청담동과 도산공원 앞길의 소비문화가 과시욕에 바탕했다면, 다양한 고급식당과 카페가 어우러진 가로수길은 편안한 휴식과 즐김에 방점을 찍는다. 통유리와 널찍한 테라스가 특징인 ‘블룸 앤 구떼’는 신사동 가로수길 카페의 대표 주자 격이다. 꽃집을 겸하고 있는 점이 독특한데, 마치 정원 속에 들어앉은 것 같은 기분을 줘 자연친화적 노천카페로 불린다.
커피보다는 혀에 착 달라붙는 치즈케이크 맛에 손님이 붐빈다. 지하철 3호선 신사역 8번 출구에서 도보로 18분. (02)545-6659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사진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 평창동·청담동·정자동 테라스 카페 '3色 개성'
가게 밖으로 나왔다고 모두 좋은 테라스, 노천가게는 아니다. 인테리어 전문가들이 꼽는 훌륭한 테라스의 조건은 주변 환경과의 조화다. 한 도시나 지역, 거리의 문화에 함께 녹아드는 테라스를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울ㆍ경기 지역의 대표적인 테라스카페 거리인 서울 평창동과 청담동, 경기 분당 정자동을 비교해 봐도 테라스는 각각 서로 다른 공간에서 저마다의 개성을 뿜어내고 있다.
평창동 테라스 거리에서는 산 위에서 서울을 조망하는 지역의 특성이 묻어난다. 사위는 고요하고 고객들도 편안한 만남과 휴식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테이블 밀도가 높지 않고 소재는 목재 가구가 많은 편이다. 요란하기보다 조용한 저녁의 산자락에 은은하게 젖어 드는 조명도 포인트.
평창동 테라스가 '오래된 나무' 같은 느낌이라면, 전문직 여피 문화의 대표적 거리인 청담동 테라스는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금속성의 느낌을 준다. 화려한 메탈 가구, 자신의 존재를 과감히 드러내는 조명은 이 거리를 오가는 젊은이들을 그대로 닮아 있다.
이 두 곳에 비해 분당 정자동 테라스는 '삶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서울로 출퇴근하는 이들을 위한 주거단지가 조성된 이곳의 테라스는 삶터와 쇼핑가의 두 얼굴을 자연스레 보여준다.
2, 3년 전부터 주상복합아파트 사잇길로 테라스 카페나 해외 유명 브랜드의 상업공간이 들어서면서 일본 도쿄의 다이칸야마(代官山)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공간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패션 쇼핑 거리로 유명한 다이칸야마는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가장 살고 싶은 곳' 1순위로 꼽기도 한 지역으로, 한국의 많은 건축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영감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정자동 테라스가 높은 평가를 받자 최근엔 정자동 식 카페 거리가 지역의 부동산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까지 떠올랐다.
실제로 동탄 신도시는 도시 입구에 정자동 테라스 거리를 벤치마킹한 '카페문화의 거리'를 조성할 계획을 내놓았다. 서울의 뉴타운에서도 정자동을 본뜬 카페거리 붐이 일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실내건축가협회 도종현 국장은 "좋은 테라스의 제1 조건은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라며 판박이 같은, 복제 테라스 거리의 등장을 경계하기도 했다.
이현정기자 agada20@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