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가 올해 2월 국내에 출시한 LCD TV ‘스칼렛’이 경쟁사 제품을 압도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월 1만대 이상 팔리며 ‘히트상품’의 대열에 들어섰다는 게 LG 측의 판단이다. 그런데 스칼렛 돌풍의 주역은 놀랍게도 경쟁사인 삼성전자 출신 영상기술 전문가였다.
스칼렛은 지난해 7월 LG전자에 입사한 정보근(48ㆍ사진) LCD TV 상품기획부 부장의 작품이다. 그는 LG전자로 옮기기 전까지 삼성전자에서 전 세계 영상 전문가들에게 극찬을 받은 안방극장(홈시어터)용 프로젝터 ‘700AK’를 개발했다. 이 프로젝터는 정확한 표준 색감을 구현해 영상기기 분야에서 삼성전자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그는 세계 최고 영상기술 전문가인 미국의 조 케인과 손잡고 700AK를 개발했다. 조 케인을 끌어들인 이유는 “정확한 색으로 꼽히는 표준 색감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정 부장은 “표준 색감에 대해 아무도 모르던 시절이라 당시 삼성전자에서 반대가 심했다”며 “그때나 지금이나 도망갈 길 없는 도박을 했다”고 회상했다.
표준 색감이란 말 그대로 영화감독, PD 등 영상 제작자가 촬영한 색깔이 그대로 나오는 것을 말한다. 언뜻 들으면 쉬운 말 같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TV제조업체마다 자사 제품이 진열장에서 눈에 뜨이도록 무조건 색깔을 화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색이 과장돼 자극적이지만, 그만큼 원래 색깔이 왜곡되는 셈이다. 따라서 표준 색감에 맞춰 제작된 영화를 TV로 보면 극장과 다른 색깔이 나온다.
정 부장은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9년부터 2005년 4월까지 표준 색감 구현을 위해 일했다. 그는 “국내 소비자들이 오랫동안 TV에서 보지 못했던 제대로 된 색깔을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 시절 조 케인과 손잡고 표준 색감이 나타나는 700AK 프로젝터를 개발했고, 이를 TV에 구현하기 위해 LG전자로 옮긴 것이다. 2005년 회사를 그만둔 뒤에는 기업비밀 보호서약에 묶여 1년여 동안 야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삼성전자에서도 그랬듯, LG전자에서도 표준 색감 구현에 반대가 심했다. 표준은 정확한 반면 화려하지 않아서 매장에 진열했을 때 타사 제품보다 불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정 부장은 국내 TV 사상 최초로 스칼렛에 ‘매장 모드’와 ‘가족 모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말 그대로 매장 모드는 매장 진열을 위해 색상을 과장하는 반면, 가족 모드는 집에서 편안하게 TV를 시청할 수 있도록 표준 색감에 맞춰진 것이다. 특히 ‘영화 모드’에 맞춰놓으면 극장과 별 차이 없는 색상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
삼성전자에서 시작해 경쟁사인 LG전자에서 빛을 본 정 부장의 노력은 인터넷 동호회 등에서 “스칼렛이 국내 TV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깼다”는 호평을 받으며 입 소문을 탄 끝에 월 1만대 판매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요즘 그는 내년 1월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쇼 CES에 선보일 스칼렛의 후속작 개발에 한창이다.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TV를 개발하는 게 그의 꿈이다. 정 부장은 “이제 TV가 진화할 때”라며 “단순히 보고 듣는 차원을 넘어 대화가 가능한 미래형 TV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연진 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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