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기관장 물갈이는 크게 3가지 점에서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우선 임기가 보장된 연구기관장마저 일괄 사표를 요구하는 무차별적인 교체시도가 정치보복으로 비쳐진다는 점이다. 또한 관료출신 배제 흐름이 과연 옳은 것인지, 교수나 기업 CEO 등 민간인 우대가 효율을 증대하고 공익성을 담보하는 것인지가 검증되지 않았는데도 마치 절대불변의 가치처럼 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 '정치 보복' 악순환 전례되나/ 정권 교체 = 인사 교체…눈치보기 우려
임기가 남아 있는 국책연구기관장들의 집단 사표는 정치적으로도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돼야 할 연구기관마저 전 정권 출신 인사라는 이유로 교체된다면 이는 다분히 정권 교체에 따른 정치보복성 인사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무직 성향인 공기업에 이어 순수 연구기관 마저 정치적 이유로 인사가 진행된다면 자칫 정부 산하 기관 전체가 ‘정권의 눈치보기’와 ‘코드 맞추기’로 흐를 공산이 커진다. 임기를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공기업에서 연구기관까지 해당 직원들의 소신 있는 업무 수행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연구기관의 경우 공정한 정책개발과 심도 있는 연구보다 정권의 입맛에 맞춘 결과물을 내놓을 우려도 제기된다. 당연히 국가의 크나큰 손실로 귀결된다.
더구나 이런 부작용이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될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임기제 전통이 깨지면 다음 정부에서도 현 정부에서 기용된 인사를 재기용할 이유가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정권의 정치보복이 정치ㆍ사회적으로 당연시 된다는 것이다.
이는 전 정권 인사 사퇴→정권 입맛에 따라 후임 결정→기관의 정권 예속화→정권 교체 후 다시 코드인사 식의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임기가 보장된 기관의 인사에 대해서는 인선의 원칙과 기준이 보다 명확해야 한다”면서 “더구나 국가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의 경우 더욱 정치 바람을 타지 않아야 국가 대계를 위한 올바른 연구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정치로부터 자유로우면서 보다 질 높은 대국민 서비스를 위해 도입된 기관장들의 임기제 취지가 정치적 이유로 무색해지고 있다.
▲ 관료 배제 능사인가/ 수십 년 행정경험에 '낙하산 딱지' 곤란
코리안리의 박종원 사장. 무려 4연임에 성공하며 11년째 장수하고 있는 금융권 '스타CEO'다. 박 사장은 관료 출신이다. 더구나 '모피아(옛 재경부 관료를 지칭하는 말)'다. 1998년7월 당시 공기업이던 코리안리에 처음 입성했을 때, 그 역시 '낙하산 인사' 비판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파산 직전의 회사를 아시아 1위 우량 재보험사로 키워낸 지금, 적어도 그의 관료경력을 문제 삼거나 능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명박 정부의 공기업 CEO인사 대원칙 중의 하나가 '관료 배제 원칙'이다. 상당수 국민들은 퇴임 관료들의 무차별적인 낙하산 행진에 제동을 걸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사실 A국책은행은 재경부, B공사는 금융감독위원회' 식의 철저한 나눠먹기 인사관행의 결과, 그간 민간 출신은 명함을 내밀 수조차 없었다. 과거 국책은행장 공모에 참여했던 한 민간 인사는 "어차피 관료 출신이 내정돼 있는데 왜 눈치 없게 응모했느냐"는 얘기까지 들어야 했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퇴임 관료의 낙하산 기용은 일종의 '이연된 부패'라고 본다"며 "현직에 있을 때 인센티브를 줄 수 없기 때문에 물러나면 보상을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관료여야만 한다"는 지금의 관행 못지않게 "관료는 무조건 안 된다"는 발상도 매우 위험하다. 오히려 수십년 간의 행정경험을 퇴임 후에도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금융경력이 거의 없는 관료출신이 국책 금융기관장을 맡는 식이라면 당연히 배제되어야 겠지만, 유관분야 경력과 경험이 충분하다면 인위적으로 배척할 까닭은 없다는 지적이다. 오철호 숭실대 교수는 "낙하산 인사는 곧 전문성이 없다는 것이 전제"라며 "관료든 민간이든 전문성이 있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 민간·교수는 검증된 카드? 報恩발탁 우려… 연봉제한도 인재영입 벽
민간 출신과 교수 위주로 공기업 최고경영자(CEO) 인사를 단행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방침은 실용주의 철학과도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기업에 민간 영역처럼 변화를 추구하고 활력을 불어넣자는 것이다. 하지만 민간 출신이라고 또 교수 출신이라고 능사일 수는 없다. 아니, 자칫 더 큰 부작용만 낳을 수 있다.
가장 우려가 되는 것이 '관제(官製) 낙하산' 대신 '사제(私製) 낙하산'이 투하될 가능성이다. 관료 출신을 배제하고 민간 출신을 기용하겠다는 것이, 결국 정치인이나 새 정부에 음양으로 도움을 준 민간출신과 교수들을 배려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시중엔 차기 금융공기업 사장 후보로 현 정부 실세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인사들이 거론되고 있다. 김기원 방송대 교수는 "인수위원회부터 장관, 청와대 수석 인사까지 이명박 정부의 인사가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검증되지 않은 민간과 교수 출신을 기용한 것 때문 아니냐"고 했다.
최근 정부의 공기업 CEO 보수 체제 개편 움직임과 유능한 민간 출신 기용 방침이 상충된다는 지적도 많다. 국책은행 한 관계자는 "CEO 연봉을 3억원으로 제한하겠다고 하는데, 과연 그 정도 연봉으로 얼마나 유능한 민간 인재를 영입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적어도 관료 출신을 능가하는 전문성을 갖춘 인물을 영입하려면, 오히려 지금보다 보수를 대폭 높여주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김기원 교수는 "허수아비로 전락한 개별 공기업의 사장추천위원회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며 "공기업마다 특성이 다른 상황에서 일관된 인사 지침을 청와대가 내린다는 것 자체부터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 참에 출신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유능한 인재들이 공공 부문과 학계, 기업 등을 쉽게 옮겨 다니게 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 10년 前정권교체 때는 어땠나
"이렇게 살벌할 수가 있나."
이명박 정부 들어 정부 산하기관장들에 대한 사퇴 압박으로 임기제가 유명무실해진 데 대해 한 정치권 인사는 30일 이렇게 말했다. 꼭 10년 전인 1998년, 국민의 정부 초기 산하기관장 인사에 청와대 핵심관계자로 깊게 관여했던 그는 "새 정부가 임기직을 마치 엽관제의 대상으로 보는 것 같다"며 "공직은 선거에 이겼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리품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총리실이 전면에 나서 공개적으로 국책연구기관장들에게 일괄 사표를 요구한 것에 대해 "정권이 바뀌면 모든 것을 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라며 "순리와 절차를 중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졌던 10년 전은 어땠을까. 당시에도 공직자 물갈이 바람은 거셌다. 정부 산하기관장을 교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특히 50년 만에 여야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데다 외환위기 책임론까지 겹치면서 비난의 표적으로 떠오른 임명직 고위공무원들은 심하게 동요했다. 일부 기관장들은 무언의 압력에 못 이겨 일찌감치 사직서를 냈고, 일부는 살아남기 위해 정치권에 끈을 대려고 발버둥치거나 끝까지 버틴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에 앞서 "공공기관장들의 임기를 보장하겠다"고 공언, 공직사회 안정에 주력했다. 김 전 대통령은 누차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 중요하다"며 "임기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술렁였던 공직사회가 많이 안정됐고, 사퇴하려고 짐을 쌌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장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참여정부 초기에는 사실상 국민의 정부를 승계했기 때문에 공공기관장들의 교체 폭이 적었다. 당시 공직사회의 분위기도 신분 불안보다는 승진이나 전직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고 한다. 정부의 한 고위인사는 "참여정부도 초기에는 '작은 정부'를 내세우면서 공무원의 경쟁력 강화를 강조했으나 그것은 효율성을 높이자는 것이었다"며 "임기제 자체를 뒤흔드는 지금 상황과는 확연하게 다르다"고 말했다.
금년 1월 중앙인사위가 청와대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 교체 후 3개월 이내에 물러난 임기제 고위직은 문민정부 때 56%, 국민의 정부 때는 45%에 이어 참여정부에서는 15%에 그쳤다. 적어도 수치상으로는 임기제가 정착되는 추세였다.
염영남 기자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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