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장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한국 남성 디자이너 1호이자 외국 유학을 하지 않은 토종의 최고령(73) 현역 디자이너. 순백의 의상과 검게 색칠한 이마, 179㎝의 거구에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 거기에 독특한 한국어 억양까지. 코미디의 소재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친숙한 예술가, 앙드레 김이다.
앙드레 김에게선 늘 반쯤만 소통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반쯤은 편견으로 곡해돼 있지만, 한 겹의 막으로 가로막혀 있어 다가갈 수 없다는 느낌. 지난달 22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패션쇼에 이어 29일 열린 부산 프레타포르테 2008 오프닝 준비로 분주한 앙드레 김을 서울 신사동 앙드레 김 의상실에서 만났다. 30㎝를 떼고 마주한 앙드레 김은 웃을 때 특히 청년 같았다.
- 패션쇼를 참 많이 하세요. 지금까지 하신 횟수를 세어보셨나요?
“제가 1962년 첫 의상발표회를 하고 지금 60년, 아니, 파든 미(Pardon me), 46년째거든요. 아마 국내에서는 130~140회 되는 것 같고, 외국에서는 한 80회 되는 거 같아요.”
- 한국에서 가장 패션쇼를 많이 하는 디자이너인 것 같아요. 앙드레 김 패션쇼는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기 위한 패션쇼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상품처럼 브랜드화됐는데요.
“제 패션쇼는 계절을 위한 바이어 쇼가 아니에요. 제가 디자이너를 시작할 때부터 제 패션쇼는 하나의 예술문화행사로, 종합예술의 무대로 이끌어가는 걸 원했어요. 오래 전에는 패션쇼를 유행을 창조해내는 행사로만 생각했지 예술이라는 이메이지(image)가 강하지 않았거든요.
영국의 로열 오페라단이나 러시아 볼쇼이발레단, 런던 필하모니 같은 건 공연문화로 정착됐잖아요. 저도 패션쇼를 하나의 문화공연으로 꾸준히 이끌어온 결과 최근엔 그런 이메이지가 많이 부각돼서 여러 중요한 행사에 초청 받게 되고, 국내외로 정착이 돼가고 있어요.”
- 쇼는 직접 다 각본을 짜고 연출하시나요?
“제가 디자인도 다 하고, 음악도 선곡하고, 콘티도 짜죠. 절대로 다른 사람이 해준 음악은 만족할 수가 없어요, 제가.”
- 클래식 공연을 좋아하시는 걸로 유명하시잖아요. 그것도 늘 C열 1블록에 앉아서요.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너무 좋아했어요. 저는 절에 다니거든요. 근데 가스펠 음악을 너무 좋아해요. ‘아베마리아’, 구노의 ‘아베마리아’,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이탈리아 작곡가 가치니의 ‘아베마리아’, 다 너무 좋구요. ‘피에타 시뇨레(Pieta, Signore)’, 이건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거든요. 8분이 넘는 음악인데, 마음이 조금 울적할 때 들으면 눈물이 핑 돌아요. 너무나 아름답고 성스러워서.”
- 앙드레 김 패션쇼는 전문모델보다 최고 스타들이 나오는 걸로 유명한데요. 콧대 높은 그분들도 선생님께서 전화 한 통만 하면 다 오나요?
“스케줄들이 바쁘죠. 대표적인 남성스타 중에는 장동건씨, 원빈씨, 권상우씨, 배용준씨, 여성스타 중에는 이영애씨, 김희선씨, 최지우씨, 김태희씨가 많이 출연했어요. 제가 오래 전부터 스타 여러분들을 캐스팅해서 패션쇼를 이끌어 오니까 누구라고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다른 디자이너도 연기자와 패션쇼를 해요.
저는 연기자를 무대에 세울 때는 절대로 직업모델과 함께 세우지 않거든요. 모델들은 키가 1m80㎝이 넘는데 거기다 하이힐 신죠. 우리 스타 여러분들은 다 1m60㎝에서 1m70㎝ 사이거든요. 그럼 키 큰 프로모델과 섞어놓으면 스타가 빛이 안 나지 않아요? 저는 절대로 섞지 않아요.
그건 나를 살리고 스타 여러분의 자존심을 살리는 거죠. 그런데 다른 데 보면 직업모델들이랑 섞어서 막 해요. 어우, 그건 상식 밖이죠. 우리 쇼에 나오시는 분들의 이메이지를 더 신비감 있게, 품격 있게 살리는 건 나한테도 중요한 거거든요. 감사하게 그걸 스타 여러분들이 공감 느껴 주세요.”
- ‘저 출연하고 싶어요’ 떼쓰거나 청탁하는 분들은 없나요?
“가끔 있어요. 매니지먼트 통해서 자기 소속사 배우 출연시켜달라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 쇼의 분위기와 맞으려면 지적이고 품격 있고 자기관리를 잘 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녀야 하거든요. 그게 제 기준이에요. 누드모델 한 사람은 안 하구요.”(웃음)
- 젊은 시절 꿈이 영화배우셨다면서요?
“하하, 잠깐이요. 요즘도 많이 동경하잖아요. 저도 한때 영화배우의 꿈을 갖고 출연을 해보았는데요, 작은 씬(Scene)이었지만 시사회를 보고 저는 절대로 영화배우가 될 자격이 없다 생각했어요. 저의 모습, 말씨, 움직임 여러 가지가 포토제닉하지 않았어요. 아마 제가 외국영화를 많이 안 봤으면 착각을 일으켰을지도 모르지만요.
저는 저의 결점을 빨리 느꼈어요. 체념과 단념은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하고 한 작품 하고 그만뒀죠. 1958년 <비 오는 날의 오후 세 시> 라는 영화였는데, 仄鳧?내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그렇지만 그땐 살이 빠졌을 때라 조금 서구적이었나봐요. 프랑스 종군기자 역할이었어요.” 비>
- 디자이너가 돼야겠다고 생각한 건 언제세요?
“제가 어릴 때부터 그림을 너무 좋아했어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라는 시골에 살았는데, 중학교 때부터 의상을 입은 여성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누나 두 분, 형 하나, 여동생 하나, 5남매인데, 집에서 누나와 여동생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중3때 6ㆍ25 동란이 일어나서 부산으로 피란 가 7년을 있었고, 서울 환도를 해서 1961년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생긴 국제디자인학원에 1회생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그 당시 양재학원은 있었지만 거긴 창의적인 디자인을 가르치는 데가 아니라 재단과 바느질만 가르치는 곳이었어요. 제가 들어갔던 학교는 서울대, 이대 미대를 졸업한 여학생들이 많았고, 남자는 전체 50명 중에 3명뿐이었어요. 너무너무 기쁘게 공부를 하게 됐고, 1년 후 첫 의상발표회를 하면서 저의 의상실을 오픈하게 됐죠.”
- 부모님이나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아버님은 밭농사 지으셨어요. 부자도 아니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은 중산층이었죠. 그러시면서도 신문을 참 열심히 보셨고, 문화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이 많이 있으셨어요. 시골엔 술 많이 드시는 아버지들이 많았는데, 참 감사하게도 저희 아버님은 술이나 담배 일절 못하셨어요. 제가 그걸 닮았어요. 아버님은 디자이너가 너무 생소하긴 하지만 제가 한다니까 믿어주셨어요. 생소한 분야지만 이해해주겠다고 하셨죠.”
앙드레 김의 의상은 화려하고 낭만적이다. 동양의 신비를 현대적 아름다움으로 재탄생시켰다는 게 일반적 평가. 하지만 그만큼 대중의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다. 일각에선 너무 공주풍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 앙드레 김의 옷을 입었을 때 이런 걸 느꼈으면 좋겠다 싶은 게 있으실 거 같아요. 패션철학이랄까요.
“제가 추구하는 세계는 지성적인 아름다움, 교양미, 품격이에요. 그래서 저는 펑크 패션, 히피 패션, 지나치게 아방가르드한 분위기나 퇴폐적인 건 싫어해요. 섹시함도 품격 있게 섹시함을 표출해야 한다는 걸 항상 중요하게 생각하죠.”
- 선생님 옷이 너무 화려하고 공주풍이다, 늘 비슷비슷하다는 지적도 있어요.
“그건 저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에요. 한국일보사에서 샤갈, 피카소, 반 고흐의 세계적인 전시회를 했죠? 피카소의 작품을 보세요. 형태는 조금씩 변하지만 흐름은 같아요. 피카소가 갑자기 반 고흐 같은 그림을 그리진 않아요. 외국 트렌드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저의 개성, 제 세계를 시기하니까 그런 말들을 하는 거죠.
20여년 전에는 제 돈으로 패션쇼를 했지만 지금은 많은 대우를 받고 있어요. 쇼 한 번에 모델료와 제작비를 빼고 제 개런티로만 8,500만원에서 1억원을 받아요. 국가적인 행사는 5,500만원에서 6,500만원 정도를 받고요. 이렇게 돈을 받고 쇼를 하는 디자이너가 어디 있나요?
외국 가서 발표하면 제 의상들을 박물관에 소장하는 뮤지엄 컬렉션(museum collection)이라고 표현해주세요. 그래서 지금 모아가고 있어요. 언젠가는 앙드레 킴 의상 박물관을 만들 거예요. 어디선가 본격적으로 제안해오면 얼마든지 기증해드릴 거예요. 특히 낮에 입는 포멀한 드레스보다는 이브닝 드레스로.”
- 앙드레 김 옷은 상류층의 유한마담들만 입을 수 있는 옷이라는 인상이 강해요.
“좀 하이소사이어티하신 분들이 많이 오셨죠. 하지만 그분들은 정신이 굉장히 검소하세요. 꼭 입어야 될 분위기, 어디 외국에 부부 동반으로 초청을 받으셨다거나 무슨 행사 이럴 때 오시거든요.
이건 독자 여러분이 이해를 해주셨으면 해요. 지금 우리나라의 컨섯 문화, 오페라를 가거나 클라식 컨서트를 갈 때는 외국의 경우 굉장히 긴 드레스를 여성들이 입거든요. 우리나라도 박정희 대통령 초창기에는 세종문화회관에 가보면 심플한 긴 드레스를 입고 오셨어요.
그런데 육영수 여사님이 세상을 떠난 다음 바뀌었죠. 장관 사모님들이 가끔 오시면 ‘영부인이 돌아가셔서 청와대 갈 때 너무 화려하게 입고 가면 미안해서 안 되겠어요’ 그런 말씀들을 하셨어요.
그 다음 또 새마을운동이 시작됐잖아요? 더 수수하게들 입게 되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칭찬이 아녜요. 컨서트엔 블랙이 세계적으로 상식이에요. 근데 우리나라는 지금 뭐 막 입으세요, 색깔을. 경제와 문화 수준이 어마어마하게 성장된 지금은 그게 그릇된 생각이에요.
긴 드레스를 안 입어도 단아한 블랙 수트 입으시는 게 무대에 출연한 아티스트 여러분에게 예의를 표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캠페인이 앞으로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 앙드레 김 의상실에는 맞춤복만 있잖아요. 저희 같은 사람이 앙드레 김 드레스나 정장을 입고 싶다고 해서 오면 돈을 얼마나 들고 와야 할까요?
“옛날엔 가격 밝히면 독자 여러분들이 소외감 느낀다고 그랬는데…. 보통 정장은 300만원부터 시작하고요, 이브닝 드레스는 550만원, 600만원 그 정도요.”
- 앙드레 김 브랜드들이 다 잘나가고 있어요. 2002년 출시한 앙드레 김 속옷 ‘엔타르카’를 시작으로 골프웨어, 침구, 화장품, 안경, 조명, 넥타이, 도자기, 여기에 냉장고와 에어컨 등 가전제품에까지 앙드레 김의 브랜드가 찍혔는데요. 디자이너에서 사업가, 경영인으로 변신하신 건가요?
“아뇨. 경영은 지금도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전개시킬 수 있느냐 하면, 제가 마케팅, 비즈니스 이걸 다하는 게 아니라 란제리 회사나 골프웨어 회사와 계약하면서 로얄티를 일년에 두 번 나눠서 받아요.
그러니까 그게 가능하죠. 운영하면 너무 머리가 아파서 자신이 없어요. 제가 라이센스로 계약하게 된 것도 햇수로 7년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만일 제가 기업화하는 재질이 있었으면 훨씬 전에 일했죠.”
오늘날의 앙드레 김을 만든 것이 그의 디자인 역량만은 아니다.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그의 개성과 스타일이 없었더라면 지금만큼 그가 대중에게 어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상이 틈입할 여지가 없는 정돈되고 준비된 모습으로 곳곳에 출몰하는 그를 대중의 눈이 좇는다. 그는 신당동 떡볶이집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진까지 화제가 되는 디자이너다.
- 왜 흰색 옷만 입으세요?
“그전에는 블랙, 네이비블루, 회색 이렇게 입고 타이 매고 그랬었거든요. 그랬는데 32~33년 전부터는 흰색 옷만 입고 싶어졌어요. 하루에 한 세 번쯤 바꿔 입는데 낭비가 아니에요. 면이거든요. 시즌별로 30여 작품씩 있어요. 보통 시상식 할 때는 블랙 턱시도를 입는 게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입어보니 너무 안 맞아요, 나의 분위기에. 그래서 그냥 흰색으로 어느 장소, 어느 곳이든지, 문상을 갈 때도 그대로 입어요. 다 이해해 주세요.”
- 헤어스타일도 특이하세요. 어떻게 고안하셨어요?
“그냥 저의 결점을 커버하고 싶어서 시도하다 보니까 지금의 스타일이 됐어요. 헤어스타일 변형한 건 한 5, 6년 됐어요. 메이크업도 저의 결점을 커버하기 위해 한 30~40년 전부터 한 거구요.”
- 기성복이나 다른 디자이너가 만든 옷은 전혀 안 입으시나요?
“저는 제가 다 해 입어요. 속옷까지는 아니지만 파자마는 제가 다 해요. 파자마도 전에는 흰색만 입다가요, 우리 아들(평생 독신으로 산 그는 40대에 아들 한 명을 입양했다)의 아기들이 태어나니까 좀 무늬 있는 걸로 바꿨어요. 아기들이 그런 걸 좋아하더라구요.
쌍둥이가 3년 3개월 됐고, 6개월 된 셋째 아기가 있어요. 그 아기가 제가 컬러 있는 걸 입으면 더 좋아하고 그래요. 나머지는 전부 흰색이에요. 잠바도 흰색, 자켓도 흰색, 내복도 흰색, 팬티도 흰색.(웃음) 집에 인테리어도 흰색, 강아지도 흰색, 차도 흰색이구요.”
- 가끔 질리지 않으세요?
“아니요. 저는 흰 눈 나리는 날을 제일 좋아하구요. 깨끗한 걸 너무 좋아해요.”
- 언제나 늘 준비된 모습으로 등장하셔서 일상은 어떨지 궁금해요. 시장 가실 때나 동네 돌아다닐 때도 같은 모습이세요?
“오우, 절대로 막 돌아다니지 않죠. 사람들에게 흐트러진 모습 안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아기들이 올 때도 파자마를 깔끔하게 입고 있어요. 항상 깔끔하고 깨끗한 분위기로 여러분을 대하고 싶고, 그게 저를 마음 더 편안하고 정신적으로 더 안정되게 하니까요.”
- 귀찮지 않으세요?
“그게 습관이 되니까 오히려 편안하죠. 그렇지 않을 땐 마음이 불안해요.”
- 신당동 떡볶이집은 자주 가세요?
“인터뷰할 때 보면 많은 분들이 제가 일본음식이나 양식만 먹을 것 같다고 상상하세요. 하지만 저는 한국음식 먹는 횟수가 제일 많아요. 소박하게 먹는 걸 좋아해서 누룽밥에 짠지, 고추장 찍어서도 잘 먹어요. 한번은 지방도시에 갔다가 시간이 바빠서 ‘김밥 1,000원’이라고 써 붙여 놓은 김밥천국에 들렀는데, 그 안에 있던 사람들뿐 아니라 지나가던 학생들까지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면서 사진을 찍고 그래요. 당황했죠.
고등학생들이 그룹으로 들어와서 악수를 청하고 그러길래 ‘여러분, 저녁 안 먹었으면 제가 살게 먹어요’ 그랬어요. 뭐 많이 시켜도 얼마 안 되지 않아요?(웃음) 그런 순간이 너무 재밌고 기뻤어요. 그런 열기가 있고 순수함이 있고…. 신당동 떡볶이는 일년에 한 번씩 가는데, 맛있어요.”
- 말씀하실 때 영어 많이 쓰신다고 말들이 있었잖아요. 2006년에 한글문화연대에 의해 ‘우리말 해침꾼’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요.
“앙드레 킴이다 그러면 과장해서 ‘판타스틱~’ ‘엘레강~스’ 이렇게 개그맨들이 많이 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진짜 그런 말을 쓰는 줄로 착각들을 하는 거죠. 하지만 저는 그런 미국식 악아??잘 안 써요. 영국식 악센트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미국문화 미국시민 다 너무 좋아하지만 미국식 영어보다는 영국식 악스포드(Oxford) 악센트를 굉장히 품격 있게 생각해요.
패션쇼를 할 때는 전문 MC가 있어도 VIP 소개는 제가 영어, 한국말 두 가지 언어로 하거든요. 이젠 제가 영국식 영어를 쓴다는 걸 아시는 분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억지로 미국식 악센트 굴리는 거 하면 부자연스러워요. 얼치기로 배운 사람들이 굴리는 걸 하면 참 어설픈 영어가 되죠.”
- 평생 독신으로 사셨는데 왜 결혼 안 하셨어요?
“그런 질문 몇십년 전에 받고 오랜만이에요. 조르지오 아르마니도 안 했고, 지아프랑코 페레도, 크리스찬 디올도 안 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안 했기 때문에 제가 안 한 건 아니고, 일에 열중하다 보니까 가정적인 그런 게 약했나봐요.”
- 항간에는 그 원인이 성적 정체성 때문이라는 말들도 있었는데요.
“아휴. 이제 그런 건 신경 안 써요. 혼자 있으니까 그런 소문도 있고 그랬지만, 제가 그런 걸 일일이 해명하고 싶지도 않구요.”
- 보통의 한국남성과 참 다른 삶의 행로를 밟아오셨는데, 외롭지 않으셨어요?
“참 많이 다른 인생이었죠. 나이 드신 부부가 다정하게 레스토랑에 오셔서 식사하시고 여행 다니시는 거 보면 참 아름다워 보여요. 결혼을 안 한 저에게는 외로움도 있고, 물론 보람과 기쁜 일도 있지만, 고독할 때가 많죠.
그렇지만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인 분들은 고독함과 외로움을 경험하면서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킨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이 경험하니까요. 고독하고 외로울 때는 일에 대한 몰두를 더 많이 하게 되거든요. 순간적으로 고독함을 잊게 되니까요. 그래서 일에 열중, 열중, 집중하고….
예를 들어 외롭다고 나가서 술 마시고 고스톱 치고 트럼프 하고 모여서 수다 떨고 그럼 재밌지만요, 세계적인 대가들, 꼭 앙드레 킴 기준하지 않아도, 여러 분야에 걸쳐서 세계적인 예술가들은 고독한 순간, 외로운 순간에 많은 작품을 탄생시킨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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