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한국의 총선을 지켜봤다. 공천과 이후 뒤따른 탈당 파동을 빼놓으면 한국의 선거전은 미국에 비해 오히려 더 신사적인 것 같아 보인다. 재래시장을 방문해 유권자들과 악수하고,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한 표를 호소하며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모습, 가슴에 후보의 사진이 박힌 띠를 두른 채 길모퉁이에서 메가폰을 대놓고 정견 발표를 하는 모습, 미인 탤런트까지 대동하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허리를 90도 이상 굽혀 인사하는 모습 등은 미국 선거전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광경들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성질이 급해 화가 나면 정면에서 멱살을 잡고 서로 죽일 듯이 툭탁거리다가도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 한 병으로 모든 걸 풀고 다음 날부터는 오히려 더 친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다르다. 겉으로는 미소를 짓지만 어느 때든 뒤통수를 강타한다. 전부 미소를 보내니 누가 적인지 우군인지 알 수도 없다. 언제 누가 어디서 어떻게 뒤통수를 칠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미국 선거에서는 사립 탐정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사립탐정을 고용해 최대 경쟁자인 현역 주 상원의원 척 베일러에 대한 뒷조사를 시작했다. 조사 내용은 첫째, 감옥에 갔던 일이 있는지 둘째, 세금 미납 또는 파산선고를 한 적이 있는지 셋째, 과거 투표 성적이 좋았는지 그리고 넷째는 가장 인기 품목인 여자 문제다. 부모 형제, 처갓집 사돈의 팔촌까지 어떤 약점이라도 캐낸다. 그 약점들을 심각성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고는 언제 어떻게 터트릴 것인지 치밀하게 연구한다. 투표일 일주일 전쯤부터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시작으로 폭발적인 폭로 작전으로 뒤통수를 치기 시작한다.
미국에서도 대부분 유권자들은 생활에 바빠 선거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투표일을 일주일 정도 남기고서야 누구를 찍을까 마음을 정한다. 때문에 폭로는 이 때가 가장 효과적이며, 이 때 귀신도 모르게 겉으로는 웃으면서 상대의 뒤통수를 얼마나 세게 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수가 허다하다. 뒤통수를 칠 땐 강하게 쳐서 졸도하게 만들어야지 어설피 쳤다간 되레 역습을 당하는 경우도 여러 번 봤다. 선거에 패배하고 정신을 되찾은 뒤에 법정에 고소를 해봤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는 그대로 넘어간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 일주일 동안은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매일 우편물을 초조하게 기다리게 된다. 끔찍한 사진과 함께 혹독한 인신공격이 오가는 때도 대개 바로 마지막 일주일이다.
미국은 한국 같이 20일 간 선거운동 기간을 주는 게 아니라 아무 때라도 선거운동을 시작할 수 있다. 다만 가두연설은 시끄럽다는 이유로 일체 금지한다. 무대를 설치하고 배우들이 춤을 추거나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허리를 굽혀 깎듯이 인사하는 모습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미국의 선거운동은 어떻게 하나. 미국에서 선거는 주로 우편물과 야외 플래카드, 버스 사인,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이뤄지며 후보들은 적어도 4번 정도는 텔레비전 앞에서, 또 서너 번 정도는 강당에 모여 토론회를 갖는다. 그밖에 시민단체들과 로타리 클럽 같은 영향력 있는 친목단체, 조찬 모임들에서 정견 발표를 한다.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한 내게 가장 힘들고 인상 깊었던 일은 800여 명의 유권자들이 모인 가운데 열렸던 첫 번째 정견 발표였다. 기자들이 꽉 찼고, 텔레비전 카메라가 클로즈업하는 긴장된 분위기에서 우선 각자 2분씩 자기 소개를 한다. 준비된 연설문 등은 일체 읽지 못하고 빈 손으로 해야 한다.
내 옆에 앉았던 연방 상무부의 전속 변호사가 먼저였다. 청산유수로 말을 너무나 잘 해 내 자신까지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째로 나선 주 상원의원은 의정생활의 업적을 과시하며 정치가답게 박력 있는 언사로 경험이 많고 이미 검증된 자신만이 적격자라고 주장했다. 나는 많은 백인들 앞에서 연설한 경험이 없었던 탓인지 차례가 가까워오면서 목이 타고 입술이 마르고, 무엇보다 몸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덜덜 떨렸다.
그런데 막상 내 차례가 돼 마이크를 잡으니 떨리던 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오히려 침착해졌다. 나는 “내 오른쪽에 앉은 직업 정치인 같이 자랑할만한 의회 업적도 없고, 왼편의 변호사 같이 말솜씨가 유창하지도 못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전혀 가식이 없는 사실 그대로이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진실 뿐이다. 나는 직업이 정치인이나 변호사가 아닌 공학도이기 때문에 오직 사실 그대로 밖에 말할 줄 모른다”라는 말로 내 소개를 시작했다. 유창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세련된 표현의 내 발언에 별안간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고, 나는 너무 놀란 한편 용기가 나고 자신이 생겼다.
그렇다. 자신이 생겼다. 자신이 생기니 겁날 게 없었다. 30년 전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 접시를 닦던 일이 퍼뜩 생각났다. 동양 사람이라고 멸시 받던 생각도 떠올랐다. 그렇다. 나는 한때 동양 놈 접시닦기였다. 1960년대에는 동양 사람은 자기 집도 장만하기 어려웠다.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직장은 동양 사람에겐 거의 드물었고, 세탁업 아니면 정원사가 고작이었다.
내게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비하해 일컫는 “칭” 또는 “잽” 이라고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던 백인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게 바로 어제 같았는데 이젠 내가 바로 그들 앞에 서서 기립 박수를 받고, 또 동양 사람인 나를 열렬히 지지하는 이들을 내려다 보니 내 마음은 참으로 감격으로 벅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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