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누군가 “섬뜩하다”고 말했다. 휴일 서울 한복판에 중화인민공화국 오성홍기의 붉은 물결이 너울댄 광경을 지켜 본 당혹감을 무심결에 내비친 것으로 들었다. 인터넷에는 ‘되놈’들이 방자하게 남의 나라에서 떼지어 난동을 벌인 것을 욕하는 글이 숱하게 올랐다. 티베트 사태에 항의하고 올림픽 반대를 외치는 시위대를 폭행까지 한 것에 격앙한 이가 많았다.
‘중국 인식’ 어긋난 데 당혹
붉은 깃발을 치켜든 중국인 수천 명이 성화 행렬을 에워싸고 서울 거리를 누볐다고 해서,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는 말은 과장되게 들린다. 그러나 “6ㆍ25 이후 처음”이라는 농담까지 하는 걸 보면,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평소 인식과 서울 거리에서 목격한 모습 사이에서 심한 괴리를 느낀 듯하다.
언론은 과격시위가 눈에 거슬린 점을 지적하고, 지나친 민족주의 표출을 우려하는 선에 머물렀다. 중국인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성화 봉송이 당초 우려에 비해 큰 차질 없이 끝난 데다, 민감한 ‘민족주의’를 심각하게 논할 계제는 아니라고 본 듯하다. 한가롭다고 여기겠지만, 나는 “중국인 유학생이 많긴 많구나” 하는 생각을 먼저 했다. 또 “서구가 재촉한 세계화가 누구보다 중국에 유리하게 세계 질서를 바꾸고 있다“는 서구 학자의 논평을 떠올렸다.
티베트 인권이나 ‘중화 민족주의’ 논란에 무심해서가 아니다. 휴일 서울거리의 소동이 중국과 우리 자신의 거창한 변화를 새삼 일깨운다고 생각했다. 그 대세를 잊거나 익숙한 탓에 ‘붉은 깃발’ 물결에 당혹해 하고, 6ㆍ25 전쟁 역사를 더듬는 게 아닌가 싶다.
시위대의 주축인 중국인 유학생은 현재 4만 명에 가깝다. 외국인 등록 중국인은 조선족을 포함해 모두 40만 명, 순수 한족만 10만 명이다. 이 가운데 경찰 추계로 무려 8,000명이 올림픽 성화를 지키려 몰려온 사실은 놀랍다. 붉은 옷차림에 열정적으로 애국적 구호를 외치는 모습에서 오만한 ‘중화 민족주의’를 느꼈을 수 있다.
그러나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우리가 세계 만방에 자랑한 ‘붉은 응원’ 물결을 중국인들과 국제사회가 좋게만 보았을까. 우리는 번듯한 민주 국가이고, 저들은 소수민족 인권을 억압하는 공산독재 국가이니 애초 비교할 게 못 되는 것일까. 또 중국에 5만 명 넘게 가있는 우리 유학생들이 같은 처지가 되면 어찌 행동할까.
우리와 저들의 ‘민족주의’를 아주 다른 시각으로 볼 것은 아니다. 그에 앞서, 제국주의 침탈과 후진국의 멍에를 막 벗어 던진 사회의 유별난 올림픽 열정을 빗나간 애국주의로 폄하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 그런 이념과 가치의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서울거리에서 한국인과 중국인 시위대가 뒤엉킨 모습에서 인적ㆍ물적 교류의 폭을 확인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다.
‘세계화’ 논리를 언급한 것은 중국의 경제적 도약이 시장의 세계화에 크게 힘입었고, 올림픽 유치도 그 성취를 국제사회가 인정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 선진국에 훨씬 많은 중국인 유학생들이 나가있는 것도 중국이 세계화 흐름의 주역으로 부상한 것을 일러준다. 평양 축구장과 거리에 태극기와 ‘붉은 응원’ 물결이 넘실대는 것을 꺼리는 북한의 옹색한 안목을 나무라면서, 서울의 ‘붉은 깃발’ 행렬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그래서 어색하다.
서구의 엇갈린 ‘중국 인식’ 살펴야
서구는 티베트 사태를 놓고 중국이 보편적 가치를 짓밟는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 위선 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흔히 들린다. 티베트의 봉건적 신정체제가 중국의 권위적 자본주의 시혜보다 진실로 인민의 자유와 복지에 유익한 것인지 반문하는 이들이 많다.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도 ‘순진무구한 성자’라는 칭송과 ‘구치(Gucci) 신은 정치승려’라는 냉소가 엇갈린다. 그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젊은이들의 자본주의 의식’을 걱정한 아이러니도 함께 새겨볼 만 하다.
강병태 수석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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