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고 있는 국어사전을 들춰 '해웃값'을 찾아보니, "기생이나 창녀들과 상관하고 그 대가로 주는 돈"이라 풀이돼 있다. 비슷한 뜻의 말로 해웃돈, 화대(花代), 화채(花債), 꽃값, 놀음차 따위가 있단다.
놀음차는, 역시 이 사전에 따르면, "잔치 때, 기생이나 악공(樂工)에게 수고했다고 주는 돈이나 물건"을 가리킨다. 해웃값보다 뜻이 넓다.
'놀음'은 '놀다'에서 나온 말이니, 놀음차는 노는 데 드는 돈인 셈이다. 그 놀음놀이의 알짜가 섹스와 음악이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노래'도 '놀다'의 어근에 명사화 접미사 '애'가 붙어 생겨난 말이다. 그러니까 노래는 본디 놀이라는 뜻이었다. 노름이나 노릇 같은 말들도 다 '놀다'에서 나왔다.
해웃값과 그 유의어들은, '화대'를 빼놓으면, 오늘날 널리 쓰이지 않는다. 고리삭은 느낌이 짙어서 그리 됐을 것이다. 언어순수성과 모더니티를 제법 뽐내는 '꽃값'에서도, 은유의 그윽함보다는 외려 날비린내가 승하다.
해웃값은 해우(解憂)의 대가라는 뜻일 테다. 근심을 풀어준 데 대한 사례금. 절간에서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 부르는 것과 비슷한 발상이다.
화대나 화채나 꽃값 같은 말에서, 꽃은 여성(의 몸)의 은유다. 여성을 꽃에 견주는 일은 고금동서의 자연언어에 흔하다. 그 때, 꽃을 꺾는다는 것은 여성과 합방한다, 더 나아가 여성의 정조를 앗는다는 뜻을 지닌다.
고려속요 <서경별곡> 의 끝머리는 (반복구와 여음구를 빼고 현대표기로 옮기면) "대동강 건너편 꽃을/ 배 타들면 꺾으리이다"인데, 여기서 꽃을 꺾는다는 것은 여자와 잠자리를 함께 한다는 뜻이다. 본디 꽃을 딴다는 뜻이었던 프랑스어 데플로레(deflorer)나 영어 디플라우어(deflower)도 처녀를 능욕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서경별곡>
花代는 '거리의 꽃'이 파는 性의 값
'꽃'의 15세기 형태는 '곶'이다. 아내나 여자를 뜻했던 '갓'과 형태가 닮은 것이 흥미롭다. 그 둘은 동원어(同源語)일까? 옛 한국인들의 상상력은 아내나 여자를 꽃에 고스란히 포갰던 걸까? 또렷한 언어사적 증거가 없으니, 우연히 형태가 닮은 것이라 보는 게 안전하겠다.
꽃은 여성을 향한(생각해 보니, 남성을 아울러도 되겠다) 사랑을 나른다. 조의나 축의를 드러내는 꽃들도 있으나, 꽃의 쓰임새는 주로 사랑의 드러냄이다. 이 행성의 수많은 남자들이(때로는 여자들이) 여자들에게(때로는 남자들에게) 사랑의 표시로 꽃(다발)을 건넨다. 소박한 연애에 드는 돈의 적잖은 부분은 꽃값(해웃값말고 꽃 사는 데 드는 돈)이다.
1천수백 년 전 어느 견우(牽牛)노인(고유명사가 아니라 그저 '소 끄는 늙은이'라는 뜻이다)이 수로(水路) 부인에게 바쳤다는 꽃과 노래 얘기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향가 해석은 지금도 갈 길이 멀어서 <헌화가> 의 정확한 해석은 어려우나, 홍기문 선생(그는 이 노래를 <꽃흘가> 라 불렀다)은 이 노래를 이리 옮겼다. "붉은 바위 가에서/ 손에 잡은 어미소 놓으시고/ 나를 부끄러워 아니하시면/ 꽃을 꺾어 드리오리다." 꽃흘가> 헌화가>
'꽃을 꺾다·바치다' 은유, 동서고금이 공유
<삼국유사> 가 전하는 이 노래의 배경 설화는 이렇다.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바닷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있었다. 옆에는 돌산이 병풍처럼 바다를 둘러서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데, 맨 꼭대기에 철쭉꽃이 함초롬히 피었다. 삼국유사>
공의 부인 수로가 꽃을 탐내, 수행원들에게 꽃을 꺾어 달라 부탁했다. 사람이 올라갈 데가 못 된다며 모두 고개를 젓는데, 새끼 밴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늙은이가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와서 노래와 함께 바쳤다는 이야기.
지아비를 바로 곁에 둔 수로부인을 이 이름 모를 늙은이가 감히 '사랑'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의 수고에 사랑 비슷한 흠모가 담겼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겠다.
사랑의 꽃들은, 피어나고 이울면서,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쓸쓸히 환기시킨다. 그 덧없음을 꽃에 가탁한 노래로서 내 마음을 크게 흔드는 것 하나는 16세기 프랑스 시인 피에르 드 롱사르의 것이다.
"내 손으로 추리고 묶어/ 네게 보내는 이 꽃송이들/ 지금은 한껏 피었지만/ 내일이면 덧없이 지리// 그러니 알겠지? 꽃 같은 네 아리따움도/ 머지않아 시들어/ 꽃처럼 덧없이 지리라는 걸."
심성사(心性史)를 공부하는 이들은 옛 사람과 요즘 사람의 마음자리가 적잖이 다르다 여긴다. 그러나 롱사르의 이 시를 읽다 보면, 사람의 마음결에는 사회변동의 인력에 빨려 들어가지 않는 고갱이가 만만찮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순애비련을 그린 영화 덕분에 널리 알려진 노래의 한탄처럼, "장미가 피어나고/ 마침내 이울 듯/ 청년의 홍안도 그렇고/ 처녀의 연용(娟容)도 그러리니."
性을 사고파는 것… 불법이지만 미묘한 문제
꽃값은 '거리의 꽃'?파는 성의 값이다. 성을 파는 것이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속설도 있지만, 오늘날 적잖은 사회에서 성 매매는 불법이다. 그것을 합법화한 사회에서도, 성 매매는 윤리적 비난의 표적이 되기 일쑤다. 그러나 이것은 미묘한 문제다.
앙리코 마시아스라는 프랑스 가수가 부른 샹송 <사랑엔 이유가 없어요> (L'amour, c'est pour rien)에는 "사랑은 팔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어요/ 그저 줄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이 나온다. 속세간의 원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다. 사랑엔>
이 노래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 곧 순애(純愛)를 뜻하다 해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마음도 예사로이 돈을 따른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하물며 꽃값은 이런 순애의 대가가 아니라 성의 대가다. 그걸 주고받아서는 안 되는 걸까?
우선, 성을 파는 사람을 나무랄 수 있을까? 성의 일차 판매자는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벌기 어려운 사람들, 그러면서도 사회안전망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기 십상이다. 이렇게 성을 팔아서만 삶을 꾸릴 수 있는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물론, 복지를 두툼히 쌓은 사회에도 성 판매자는 있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받는 돈이 충분치 않다 여기는 사람들일 테다.
생활이 넉넉한 사람들이 성을 팔기도 한다. 이들은 좀더 쉬운 노동으로 좀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일 테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경우엔, 첫 번째 경우와 달리, 윤리적으로 비난할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유의사에 따른 거래를 통해 제가끔 원하는 걸 얻는 것이 경제 구성원리로 자리잡은 사회에서, 특정한 노동력을 파는 사람들을 들춰내 비난하는 것은, 더 나아가 그 노동을 불법화하는 것은 정당화하기 어려울 것 같다.
다음, 성을 사는 사람을 나무랄 수 있을까? 성 구매자는, 대개, 사지 않고선 그것을 누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배우자나 연인이 없는 사람들, 또는 성적 매력이 하룻밤 짝을 호리기에도 모자란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성욕은, 먹고자 하는 욕구나 자고자 하는 욕구처럼, 원초적이고 강렬한 본능이다.
특정한 종파의 직업적 종교인말고는 제 생애 내내 이 욕구를 억누르는 사람은 없다. 성욕을 가눌 수 없을 만큼 건강한 사람에게 성 파트너가 없다면, 그가 고를 수 있는 방법은 성을 사는 것뿐이다. 그러니 그를 힐난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건강하지만 매력 없는 누군가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성 매매가 불법이라면? 그래서 성 공급자를 찾기 어렵다면? 그는 의사 성행위라 할 자위에 몰두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가능성은 그가 완력으로 남을 굴복시켜 강제로 성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 매매를 철저히 불법화하는 것이 사회의 피륙을 찢어낼 수 있음을 뜻한다.
디오게네스 "배고픔도 이렇게 가라앉힌다면… "
불법화해도, 성 매매는 이뤄지게 마련이다. 이 피해자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는 이들의 다수는 힘없는 사람들이다. 몰래 이뤄질 수조차 없을 만큼 성 매매의 공간을 말끔히 쓸어냈을 땐, 솟구치는 성욕이 강간 같은 성범죄에서 출구를 찾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꽃값 없는 청결한 사회보다 꽃값 있는 불순한 사회를 원한다.
정부가 할 일은 성 시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성 노동자들이 착취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눈길을 건네는 것이다. 그리고 직접적 간여를 삼가면서도, 꽃값이 공정가격에 가까워지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길거리의 빈 나무통에서 살며 자족자제를 실천했다는 거지 철학자 '개 같은 디오게네스'의 일화 하나가 문득 가슴에 얹힌다. 하얀 대낮, 광장에서 자위를 하며 육욕을 달래던 그는 이를 비난하는 구경꾼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이리 한탄했단다. "아, 배고픔도 이처럼 문질러서 가라앉힐 수 있다면!"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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