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휘도는 협곡 길… 하늘 마을 속으로
19세기 초반 남부 아프리카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검은 나폴레옹'이라는 줄루족의 무시무시한 전사 샤카가 나타났다. 그는 철권정치로 부족을 이끌며 새롭게 개발한 전술로 주변의 종족들을 가차없이 제거해 나갔다. 샤카 줄루의 침탈로 씨족 간의 살육전쟁은 연이어졌고 20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피의 광풍 속에서 바소토족은 현명한 족장 모셰셰 덕분에 부족의 궤멸을 막을 수 있었다. 모셰셰는 부족을 이끌고 드라켄스버그와 말로티 산맥 사이, 높은 산 속으로 들어가 요새를 짓고 적과 맞서 싸웠다.
그는 다른 종족일지라도 줄루족과 맞서기만 한다면 모든 피란민들을 받아들여 힘을 키웠다. 그렇게 줄루족을 이겨내고 나니 더 큰 적이 나타났다. 남아프리카에 세력을 확장하던 보어인들의 공격이었다. 모셰셰는 영국 정부의 도움을 얻어 종족과 땅을 지켜냈다.
"Ke bona Lesedi!"(빛을 보았도다!) 전장의 모셰셰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렇게 읊조렸다고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가운데 마치 섬처럼 자리잡은 국가 '레소토'. 무수한 전쟁 속에서 매일 아침 살아있음을 감사했던 모셰셰의 나라가 레소토다.
남아공에서 산악국가 레소토로 가는 길은 모두 13개. 이중 레소토의 동쪽을 감싸고 있는 해발 3,000m급의 드라켄스버그 산맥에는 단 한 개의 루트, 사니패스(Sani Pass)만 뚫려있다. 바소토족이 당나귀에 목화나 양모를 싣고 여러날을 내려와 남아공의 가게에서 생필품을 바꿔 가던 그 길이다. 아프리카의 '차마고도'인 셈이다.
'하늘의 왕국'으로 불리는 레소토로 통하는, 원시의 영토로 가는 바늘 구멍의 통로 사니패스로 떠나는 날이었다. 지난 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숙소인 북부 드라켄스버그의 리조트까지 달려온 여독이 채 풀리지 않았지만, 신새벽에 눈을 부비며 길을 나섰다. 웅장한 산맥을 따라 끊임없이 남하했다. 곧 아프리카의 태양이 떠올라 철옹성 같은 산맥의 봉우리들 위를 붉게 물들였다.
언더버그에서 4륜구동의 SUV로 갈아타고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었다. 고개 입구, 지붕이 사라진 옛 집의 흔적이 있다. 1960년에 문을 닫은 '굿 호프(Good Hope)'란 간판을 걸었던 상점이다.
예전 레소토 주민들은 당나귀에 짐을 싣고 이곳에 와서 생필품과 바꿔갔다. 자동차 길이 뚫리며 당나귀 대신 차가 주요 운송을 맡게 되자 상점의 역할은 줄어들었고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울퉁불퉁 돌이 튀어나온 길이라 차는 몹시 흔들린다. 드라이버는 이 요동을 "아프리칸 마사지"라며 싱긋 웃는다. 매캐한 흙먼지가 날려 들어오는 차 내부는 고역이지만,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은 창 밖의 풍경이 수놓는 파라다이스 때문이다.
하늘과 맞닿은 봉우리는 10여개의 사각형 기암들이 열을 지어 이어진 모습이다. 예수의 12제자의 이름을 따 '12사도 봉우리'라 부른단다. 급경사의 벼랑을 따라 오르는 길은 이리 휘고 저리 굽어지며 요동친다.
몸은 피곤하지만 점점 하늘 가까이로 오르며 틔여지는 넓은 시야엔 장쾌한 풍광이 펼쳐진다. 마침내 도착한 고갯길의 정점. 해발 2,874m, 아프리카에서 차로 넘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갯길 꼭대기다.
이제부터 레소토, 바소토족의 땅이다. 산꼭대기엔 바소토 부족민 100여명이 거주하는 사니톱 마을이 있다. 둥그런 흙돌담의 전통가옥 사이로 두툼한 담요를 두른 채 이방인을 맞는 그들. 겨울엔 눈에 파묻히고, 여름이라도 높은 고도 때문에 기온이 싸늘한 곳이라 그들은 항상 두터운 담요를 두르고 다닌다. 태어날 때 자기만의 담요를 선물받는다는, '담요의 민족'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소와 양을 키우며 사는 그들에겐 관광객을 맞는 것도 소일거리 중 하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집 안은 작은 창 하나에만 빛을 의지해 어둑했다. 바닥 가운데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화덕이 있다.
가이드는 큰돌과 작은돌을 여럿 깔고 그 위에 바닥을 덮어 집을 짓는다고 설명한다. 화덕의 불기운이 바닥의 돌틈 사이로 퍼져나가 온기가 오랫동안 남아있도록 한 레소토식 온돌이다. 현명한 민족이다.
레소토족 남자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꼭 할례를 해야 하고, 성인 남자들은 자기 집안의 독특한 문양을 새긴 단단한 나무 지팡이를 지니고 다닌다.
그들에게서 배운 '두멜라'(안녕하세요), '케얄레보아'(감사합니다)를 되뇌이며 마을길을 걷고 그들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바지에 맨발로 나온 아이는 마냥 기자의 시선을 응시했다. 손을 내밀지는 않았지만 주머니 속에 든 먹을것을 꺼내주니 고맙게 받아간다.
사니패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벼랑 끝에 마련된 사니톱 샬레 산장에서 벽난로에 몸을 녹이며 따뜻한 차 한잔을 마셨다. 찻잔 속에서 그 아이들의 맑은 웃음이 내내 맴돌고 있었다.
사니톱(레소토)=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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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맨의 고향, 드라켄스버그의 저녁 노을
레소토의 국경을 짓고 있는 남아공의 드라켄스버그 산맥은 '아프리카의 알프스'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장대한 암벽 봉우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이곳은 2000년 11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백인들이 이름지은 드라켄스버그(Drakensberg)는 '용의 산'(Dragon Mountains)이란 뜻.
하지만 줄루족은 이 산맥을 '쿠아트람바'(Quathlamba)라 불렀다. '전쟁터의 창들'이란 뜻으로, 비죽 솟은 봉우리들의 모습을 훨씬 잘 나타내는 표현이다.
드라켄스버그 산맥은 크게 북부, 중부, 남부 지역으로 나뉜다. 북부에는 로얄나탈 국립공원을 위시해 '원형극장'으로 불리는 장대한 봉우리 아래 알파인 히스 리조트 등 고급 리조트들이 여럿 자리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나 더반 등 남아공의 대도시 시민들은 이곳을 휴식처로 찾아 스위스 풍의 분위기 물씬한 가운데 아프리카에서 느끼기 힘든 청량감을 함빡 담아간다.
중부 지역의 낙타 등을 닮은 봉우리 밑의 캐세드럴 피크 자연보호 지구 내에는 디디마 샌 아트센터가 있다. 드라켄스버그 산맥 주변에 널려있는, 샌(San) 족의 자유로운 영혼을 보여주는 암벽화에 대한 자료와 자세한 설명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샌족은 2만년 전부터 아프리카에 거주해온 토속 원주민. 영화 '부시맨'의 주인공이 바로 샌족이다. 그들은 지금 다른 흑인 종족이나 백인들에 쫓겨 칼라하리, 나미비아 사막 등지에만 거주하고 있다.
샌족의 암벽화에는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영양 중 제일 덩치가 큰 일런드(Eland)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샌족에게 일런드는 단순한 샤냥거리라기보다는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대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샌족을 '일런드의 사람들'이라 부르는 이유다.
남부에서는 레소토로 넘어가는 고갯길 사니패스가 으뜸 관광 코스다. 길가에서 보이는 남아공 시골마을의 평온한 풍경, 산맥 위에 번지는 순정한 빛깔의 저녁노을은 드라켄스버그에서만 마음에 담을 수 있는 행복이다.
드라켄스버그(남아공)=글ㆍ사진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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