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해 옛 소련의 공산제국을 세웠던 니콜라이 레닌(1870~1924년)이 학력과 성적을 날조해 자신을 지적 능력이 탁월한 혁명 지도자로 부각시키는 데 활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지난 22일 레닌 탄생 138년 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러시아 유력지 네자비시마야 가제타(독립신문)는 최근 그의 학력이 조작됐다는 관련 특집기사를 실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러시아는 비록 옛 소련이 붕괴됐지만 여전히 레닌을 신성시하고 교조로 추앙하는 공산당이 존재하는 만큼 이번 네자비시마야 가제타의 기사는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레닌의 화려한 학력이 날조됐다는 주장을 논문 형식으로 신문에 게재한 것은 역사학자인 아킴 아루티유노프이다.
본명이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ich Ulyanov)인 레닌은 볼가강 변의 고향 심비르스크(현 울리야노프스크)에서 초중고를 최우등 성적으로 졸업해 금메달을 수여받은 것으로 그간 알려져 왔다.
하지만 아루티유노프에 따르면 레닌의 졸업 당시 성적표에는 ‘논리학’과목이 5단계 평가에서 ‘우’를 받은 외에 평가 가운데 남이 알아보기 어려운 악필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또한 체육 수업을 빠지고 당번 일을 게을리하는 등 불성실한 태도를 따끔하게 충고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아루티유노프는 이런 점을 들어 모든 과목 성적과 행실 평가에서 ‘수’를 받은 학생에게만 주어지는 최우수 금메달을 레닌이 받는 것이 불가능했다면서 조작을 의심했다.
이와 관련해 아루티유노프는 레닌의 누나가 회상록에서 “동생이 언제나 선생님들을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7학년(15살) 때는 그의 심한 장난 탓에 부모님이 선생님에게 불려간 적도 있다”고 적고 있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소개했다.
또한 아루티유노프는 레닌의 명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졸업장에도 의문을 나타냈다. 레닌은 1887년 카잔대학에 입학했으나 맏형 알렉산데르가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음모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교수형 당하자 학생운동에 투신한 뒤 그 해 말 퇴학당했다.
그러나 레닌은 죽은 형 알렉산데르의 모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검정시험에서 응시자 134명 가운데 수석으로 합격하면서 제1급 학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돼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졸업장은 그가 법률사무소에 변호사보로 취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아루티유노프는 레닌의 졸업증서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기재된 것을 지우고 자필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라고 고쳐 쓴 흔적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졸업 날짜 등 몇 가지에도 의심쩍은 면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아루티유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졸업생 명단에는 레닌의 본명인 ‘울리야노프’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레닌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지금까지의 공식 기록은 날조된 것으로 아루티유노프는 주장했다.
레닌은 잠시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한 후 본격적으로 마르크스 운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투옥과 시레비라 유형 등을 거쳐 1900년에는 국외 망명했다.
그는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직후 일단 귀국했다가 1907년 다시 망명해 주로 스위스에 머물면서 연구와 저술에 종사하던 중 1917년 3월 명 직후 귀국했다.
레닌은 결국 같은 11월7일 무장봉기로 과도정부를 전복하고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혁명정권을 수립하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1924년 사망한 레닌에 대해서 옛 소련 정권들은 신격화 작업을 펼쳐 그의 시신을 크렘린 앞 붉은광장의 유리관에 안치하기까지 했다.
한성숙 기자 hans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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