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문은 지금 산업의 위기에 처해 있다. 신문사 치고 흑자를 내는 데가 별로 없다. 상당수 신문은 경영학적으로는 회생불능 상태에 놓여 있다. 은행이 등을 돌리면 문을 닫아야 하는 신문사가 부지기수다. 메이저 신문은 그래도 사정이 낫다지만 그들도 매출 규모를 따지면 신생 포털 매체에 비해 왜소하기 짝이 없다.
그래선지 최근 들어 신문업계에서 방송 겸영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신문산업의 위기를 방송 겸영을 통해 타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혼자 서 있기에도 힘이 부치는 마이너 신문으로서는 방송 겸영이란 한낱 그림의 떡일 따름이다. 방송사 설립과 경영에 따르는 막대한 재원을 마련하는 것은 마이너 신문의 처지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신문법 개정요구에 담긴 의도
반대로 메이저 신문들은 방송 겸영 문제에 매우 적극적이다. 이 문제에 대한 메이저 신문의 접근은 꽤 전술적이다. 메이저 신문은 일부 독소조항을 내세워 신문법을 아예 폐기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들이 이 법에 부정적인 진짜 이유는 이 법이 신문사의 방송 겸영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당에서도 이에 화답하여 신문법을 아예 폐기하거나 그 법의 일부 내용을 고쳐 신문사의 방송 겸영을 허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불원간에 겸영문제가 뜨거운 의제로 떠오를 전망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감안하면 신문사가 방송을 겸영하는 것을 법으로 막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게 생각되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신문을 읽어주는 기계가 나오는 것이 시간문제일 뿐인 그런 세상을 살고 있다. 여성 목소리를 원하든 남성 목소리를 원하든, 빨리 읽기를 원하든 천천히 읽기를 원하든 리모콘만 조종하면 될 거라고 한다. 이렇게 기술이 매체의 벽을 마구 허무는데 법으로 어떻게 그 물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신문법은 그런 의미에서 한시적(限時的)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산업의 위기를 방송 겸영으로 극복하려는 메이저 신문의 꿈을 막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장애는 신문법이 아니다. 그 법보다는 그들 신문이 주도하여 형성한 저널리즘의 위기가 오히려 핵심적인 요인으로 작동할 개연성이 높다. 독자들은 신문을 신뢰하지 않는다. 영향력을 자랑하는 신문은 있어도 국민의 두터운 신뢰를 자신 있게 내세우는 신문은 없다. 신문이 제3자의 위치에 서기보다는 특정 정파의 편이 되어 공정 보도를 외면한 데 따른 쓰라린 업보다.
우리 언론의 정파성은 그 자체가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을 훼손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지만 신문의 정파별 비중이 심각하게 편향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악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메이저 신문 가운데 어느 하나가 보수고 다른 하나가 진보이며 또 다른 하나는 중도라면 그 경우의 정파성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재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메이저 신문은 서로 다른 입으로 같은 주장을 펴며 여론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을 일상화한 지 오래다. 그런 3인조 메이저 신문이 방송까지 겸영하게 하는 것은 여론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위협할 소지가 있다.
먼저 정파성부터 지양해야
언론의 공개시장에서 메이저 신문이 할 일은 불편부당한 자세로 바람직한 공론을 창출하는 일이다. 마이너 신문이 좌우에서 다양한 주장을 펴면 그 장점과 단점을 잘 취합하고 조절하여 최대 공약수를 이끌어 내는 일을 메이저 신문이 해야 한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메이저 신문과 마이너 신문이 이렇게 역할을 분화할 때 언론의 공개시장은 비로소 제대로 작동한다. 메이저 신문이 방송을 겸영하고자 한다면 우선 스스로 정파성을 지양하고 통합의 매체로 거듭나야 한다.
김민환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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