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모녀를 살해한 뒤 자살한 전 프로야구 스타 플레이어 출신의 이호성(41)씨. 그는 수백억원대의 빚을 진 수배자였지만, 버젓이 승용차를 몰고 휴대폰을 갖고 다니며 전국을 활보했다. 수배자 신분을 감춰준 대포폰, 대포차 등 이른바 ‘대포물’(大砲物) 때문이었다. 최근 범죄의 ‘기본도구’처럼 사용되고 있는 대포물은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는 것일까.
어떻게 만들어지나
대포물은 이용자와 명의자가 다르다. 따라서 대포물을 만드는 조직이나 업자는 가장 먼저 명의자를 찾는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자기 이름을 내돌리기는 만무한 일. 따라서 명의를 빌려주는 사람은 노숙자, 채무자, 빈곤한 노인 등 얼마 되지 않은 돈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경찰에 따르면 노숙자 이름은 5만원이면 빌릴 수 있다고 한다. 대포업자는 이들과 직접 은행이나 통신업체 창구로 가서 원하는 만큼의 통장과 휴대폰을 만든다. 본인이 직접 개설하기 때문에 과정상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 대포업자들이 가장 손쉽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최근에는 대포물 수요가 급증하면서 인터넷에서 해킹한 개인정보를 이용, 다량의 가짜 통장과 휴대폰을 만드는 기업형 조직도 생겨났다. 중국에서 가짜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을 들여와 이를 이용해 300여개의 대포통장을 만든 A(51)씨 일당이 최근 경찰에 적발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대포차의 명의 도용은 좀 다르다. 과거에는 훔친 차에 위조 번호판을 다는 수법이 많았다.하지만 요즘에는 사채업자가 대포차의 주요 공급원이다. 이들은 차를 담보로 맡긴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명의를 바꾸지 않은 채 중고차 시장에 내놓는다. 대포차를 원하는 ‘잠재적 범죄자’들은 중고차 시장에서 명의 변경이 안된 대포차를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다.
어떻게 유통되나
대포 시장도 소매와 도매로 구별된다. 한 번에 5개 미만의 물건을 취급하는 소매 거래는 인터넷을 통해 이뤄진다. 실제 엄연히 불법인데도, 주요 포털사이트에 ‘대포폰 판매’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25~30만원이면 막폰 구입 가능’‘대포폰, 상담가능 전화주세요’라는 호객용 문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에는 UCC 동영상 사이트에 인기 있는 일반 동영상을 올린 뒤, 제목에 대포통장 및 대포폰 홍보 문구와 전화번호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한 판매업자는 “인터넷을 보고 연락이 오면 택배를 통해 대포통장이나 대포폰을 주문 당일 배달한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범죄 등이 성행하면서 범죄집단끼리 대포물을 도매 형태로 거래하는 경우도 있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검거된 A씨는 총 950개의 대포통장을 중국계 보이스피싱 사기단에 넘겼다”고 말했다.
왜 뿌리 안뽑히나
경찰은 전국 도로를 누비고 있는 대포차를 11만대로 추정하고 있다. 자동차 150대 중 1대꼴인 셈인데, 휴대폰 중 대포폰 비율도 이와 비슷하다면 전국에서 사용 중인 대포폰은 약 27만대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범죄가 만들어 내는 지하경제가 없어지지 않는 한 ‘대포시장’ 역시 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포물를 만드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 이득이기 때문이다. 대포업자는 건당 제조마진이 600%에 달하는 사업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한 관계자는 “노숙자에게 5만원 주고 만든 대포통장이 30만원에 팔리는 만큼, 경찰에 걸리지 않는 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수요층도 탄탄하다. 가령 수배자 혹은 남들은 모르는 통신ㆍ결제수단을 갖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대포폰만큼 편한 게 없다. 매월 바꿔야 하는 수고만 아끼지 않는다면, 경제적으로도 유리하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30만원 주고 대포폰을 만들어 30만원어치 이상의 통화를 하고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중고차업계 관계자도 “대포차는 제대로 명의가 이전 된 중고차의 절반 값에 팔리는 만큼,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다른 범행을 저질러 우연히 적발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별도의 수사를 통해 대포업자를 적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라며 대포물의 확산을 경계했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박관규기자 qoo7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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