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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닫힌 민족주의의 허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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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닫힌 민족주의의 허망함

입력
2008.04.29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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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칭다오(靑島)에 살다가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듀크대학으로 유학간 여학생 왕치앤위앤(王千源)은 9일 대학 교정에서 열린 티베트 독립 지지 집회에 참가했다. 공교롭게도 중국 유학생들이 주도한 독립 반대 집회장의 맞은 편에서 독립 지지 집회가 열렸는데, 왕은 바로 이 지지 집회에 참석했다가 동영상에 찍혔고 그것이 다음날 유투브에 올랐다. 동영상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독립지지 참가자로 봐도 무리가 없었다.

한 여학생에 대한 마녀사냥

동영상이 중국 인터넷에 퍼지자 마자 네티즌들은 왕과 가족의 신상, 고향 집 등을 낱낱이 파헤쳐 인터넷에 공개했다. 네티즌들은 조국을 배신한 한간(漢奸)으로 왕을 낙인 찍었다. 가족이 사는 칭다오의 아파트 앞에 오물이 투척됐고 가족은 그 집을 버리고 피신했다. 왕이 졸업한 고교에서는 그의 졸업을 무효로 만들기까지 했다. 한바탕 마녀사냥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내막은 조금 다르다. 왕은 집회 참가 당시 한 중국 유학생으로부터 “왜 거기에 서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티베트 독립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대립할 게 아니라 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며 중재의 뜻을 밝혔다. 왕은 미국 언론들에 “나는 중국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지 않지만 티베트인의 자유만은 존중한다”고 말했다. 또 “마음을 닫아 걸고 대립하는 두 편에게 대화를 유도하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중국에서 조롱거리가 됐다. 스무 살 여학생의 순진한 생각은 신애국주의로 불리는 거센 민족주의의 노도에 속절없이 휩쓸려가고 말았다.

얼마 전 CNN 방송 진행자 잭 캐퍼티가 중국 비하 발언을 하자 중국의 주요 포털에는 1초당 1건의 비난 댓글이 올랐다. 지금 중국 민족주의의 열풍은 그만큼 거세다. 하지만 중국 청년들이 주도하는 이 열풍에는 결정적 흠결이 있다. 토론과 논쟁,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것이다.

인터넷에는 티베트사태를 왜곡했다는 유럽과 미국 언론에 대한 비난만 있었다. 물론 이 비난은 어느 정도 합당하다. 하지만 티베트인이 왜 분노했고 폭동에 가까운 시위가 왜 발생했는지에 관한 토론은 실종됐다. 오직 티베트인의 폭동으로 피해를 본 한족(漢族) 현지 주민의 억울한 사연, 구미 언론의 왜곡 보도 실태만이 인터넷 공간을 채웠다.

이런 상황 전개는 필연이었다. 중국 정부가 티베트 사태 발발 직후 “사태는 달라이 라마 세력이 배후 조종해 일어났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외부 세력이 사태를 유발했기에 국내적으로 티베트 문제를 어떻게 풀지에 대한 논의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토론과 성찰이 생략된 광풍

보스톤 글로브는 왕치앤위앤 사건에 대해 “건강한 민족주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아돌프 히틀러가 주입했던 병적인 열정과 구별돼야 한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또 천안문 사태 당시 충일했던 중국 청년의 건강한 비판정신이 사라진 데 대해 장탄식을 했다.

왕의 집회 참가 후 16일 만에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와의 협상을 선언했다. 사태 해결을 위해 대화가 필요하다는 왕의 순진한 생각대로 중국이 대화에 나선 것이다. 왕의 순진함을 조롱했던 중국의 수많은 젊은 네티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닫힌 민족주의 열풍은 이처럼 허망하다.

이영섭 베이징 특파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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