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 말 습관부터 소개할까 합니다. 제가 평소에 잘 쓰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강의를 하다가 좀 지루하다 싶으면 “사랑혀, 이 놈들아!”하고, 아는 사람들과 전화를 끝낼 때도 이 말로 끝냅니다. 좀 서먹하다 싶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 말을 덧붙입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나무랍니다. 오해를 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운동권 학생들을 붙잡아다 야단치고, 대학원생들 노트까지 검사하면서도 어용(御用)교수라고 대자보에 오르지 않은 것도, 수강 신청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모두 이 말 덕분입니다.
제가 이런 습관을 소개하는 것은 우리 모두 ‘사랑혀!’ 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안하고 싶어서입니다. 현대의 해체적(解體的) 가치관을 통합하는 방법도, 사분오열된 정치판을 안정시키는 방법도 이런 말을 한 뒤부터 보이기 시작할 거라는 생각에서입니다.
‘해체(deconstruction)’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한 말입니다. 과거에는 선악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대에는 자기만이 선이라며 다른 쪽의 주장을 억압으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이런 사회는 언제나 분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지요. 자기가 글러도 억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인데, 옳은데도 악의 무리가 그릇된 제도를 만들어 억압한다고 생각하니 당연하지요. 그리고 마침내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요? 그러나, 말이란 참으로 묘한 겁니다. 말하기 전까지 우리 생각과 행동은 유동적이지만, 자기 생각이 다 담기지 않은 말을 해도 그 뒤부터는 그 말에 지배를 받습 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헤어지자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시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나 나라고 저주하고도 싶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애원하고도 싶고,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원망하고도 싶어 어느 게 진짜 내 마음인지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복을 빌어 주겠다고 말한 뒤부터는 건강까지 걱정하는 말을 덧붙이기가 일쑤입니다.
최근에 과학자들이 자기공명영상(MRI) 장치로 뇌세포를 촬영해 본 결과, 우리가 윤리적인 문제를 판단을 할 때도 감정세포들이 움직이더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이성적 판단이라는 것들도 기실은 감정적인 판단이라는 겁니다.
물론,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는 ‘거절 콤플렉스’가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저두요…”라고 응답한 뒤에 내 분노가 억제되고, 그 다음에 중립적인 위치로 돌아와 너와 내 잘못이 보이고, 참다운 ‘섬김’과 ‘실용’과 ‘견제’의 방안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불안한 승리를 하는 것보다 이게 나은 방법입니다.
오늘 오훌랑 미운 사람이 있는 분들은 모두 휴대폰을 드세요. 뒤통수를 치는 사람은 국민들이 지켜볼 테니까, 이번 선거에 당선한 분들도 낙선한 분들도, ‘친박(親朴)’도 ‘친이(親李)’도, 기업주도 고용자도, 생산자도 소비자도 모두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쑥스러우면 문자라도 날리세요.
우리 이제부터 ‘척결의 문화’를 ‘사랑의 문화’로 바꾸면 어떨까요? 저도 이 글이 마무리되는 대로 요즈음 소홀히 대했던 아내와 독자 여러분들께 문자를 날릴 테니까, 여러분들도 날려 보세요. 사랑해요, 정말로 사랑해요.
尹石山 시인ㆍ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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