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계의 관심은 온통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그룹을 대외적으로 대표하게 될 이수빈(69) 삼성생명 회장의 ‘역할론’에 쏠리고 있다.
그는 28일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이 만나는 정ㆍ재계 간담회에 참석한다. ‘삼성그룹 대표’로서의 데뷔 무대인 셈이다. 그는 지금까지 ‘회장’ 직함을 유지해왔지만, 실은 현업에서 물러난 지 5년도 넘었다. 때문에 그룹 내부에서조차 ‘이수빈 카드’를 이건희 회장의 퇴진 충격 못지않게 쇼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는 “삼성의 구심점이 빠진 위기 상황에서 이수빈 회장이 어떤 역할과 권한을 행사할지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며 “고 이병철 선대 회장 시절의 인물이 그룹대표로 복귀한다는 소식에 의아스럽다는 반응이 많은 편”이라고 전했다.
이학수 삼성 전략기획실장은 22일 경영쇄신안을 발표하며 “이 회장의 역할이 대외적으로 삼성을 대표하는 일에 한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때문에 아직까지 그의 역할을 그룹의 ‘얼굴마담’정도로 여기는 시각이 상존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재계 관계자들은 이수빈 회장의 복귀를 놓고 “과거 재계의 오너 2세들이 회장으로 추대되기까지 전문경영인 체제를 통해 과도기적 전환기를 거친 사례들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출신인 이수빈 회장의 ‘후견인 역할론’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수빈 회장은 선대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1987년 그룹 총수에 오른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과 그룹 구조조정위원회 수장 등을 역임했다. 그만큼 누구보다도 이건희 회장의 마음을 잘 읽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코드’ 인사다. 이런 경력은 삼성물산 회장을 역임한 고 신현확 총리와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신 총리는 그룹 오너가 독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이병철 선대 회장에게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은 전문경영인으로 꼽힌다. 회장의 정신적 후견인으로서,‘멘토’의 역할을 한 셈이다. 그는 삼성그룹 경영권이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가는 승계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수빈 회장 역시 퇴진한 이 회장의 분신으로서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후견인’ 역할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내부 인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 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다시 경영수업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이재용 전무의 향후 행보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재계 일각에선 이 회장이 1998년 최종현 SK그룹 회장 타계 이후 전면에 나섰던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에 견줄만한 역할을 하지 않겠냐고 전망할 정도다.
손 전 회장은 39세 젊은 나이에 총수에 오른 최태원 회장을 보좌해 SK그룹을 재계 4위로 발돋움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재계 관계자는 “손 전 회장과 최 회장은 오너와 전문경영인 관계를 넘어선 파트너십을 보이며 SK그룹을 이끄는 쌍두마차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이 회장 역시 이 전무의 경영수업과 경영권 승계에 상당부분 관여할 전망이다. 이 전무가 2001년부터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해 왔지만, 여전히 경영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받고 있는 이상 이 회장의 후견인 역할은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 회장은 2002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이 전무의 경영수업에 일정 부분 관여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
전략기획실 해체로 ‘컨트롤 타워’가 사라진 삼성그룹의 계열사간 조정ㆍ조율ㆍ화합 역할도 결국 이 회장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새 정부 초기인 만큼 각종 기업 정책들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를 각 계열사가 독자적으로 챙기는 데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1991년‘패놀사태’로 위기 상황에 빠진 두산그룹의 구원투수로 나섰던 고 정수창 회장은 오너 경영의 공백을 특유의 인화와 팀워크로 극복해 낸 덕장으로 꼽힌다.
이 회장 역시 그룹 내 최고 원로로서 제조와 금융 부문을 두루 섭렵한 덕장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20여년간 CEO 자리를 지켜온 그의 숱한 경험과 위기관리 능력은‘구심점 부재’의 삼성을 ‘시스템 경영’으로 정착시키는데 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삼성이 “대외적인 업무에 한정될 것”이라고 밝힌 이 회장의 역할은 생각보다 더 커질 수 있다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장학만 기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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