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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화장실 사용 지저분… 못살겠다" 아내 폭탄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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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화장실 사용 지저분… 못살겠다" 아내 폭탄발언

입력
2008.04.25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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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실에서 별 생각 없이 피운 담배 때문에 아내에게 된 소리를 듣더니, 이번엔 화장실 양변기의 오(誤)조준 사건이 이어졌습니다. 급기야 아내로부터 “징그러워 이제 못살겠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침없는 말에 적잖이 놀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껏 내 집에 와서 쉰 살이 넘도록 허리한번 제대로 못 펴고 헌신적으로 살아온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물론이지만, 그래도 ‘좀 심하지 않나’하고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더구나 “못살겠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왔다는 사실엔 그저 씁쓸하기만 했습니다.

결국 아내와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습니다. “여보, 좀 전에 나에게 한말 진심으로 한 말이오?”그런데 아내는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답하는 겁니다. 나는 누구보다 아내의 마음을 잘 알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놀란 것은 접어 두더라도, ‘혹 그 말이 실행으로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다가왔습니다.

‘도대체 그런 생각을 한 배경엔 특별히 뭔가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실에서의 담배, 양변기에 흘린 소변사건은 어제 오늘 일 만은 아닌데….’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아내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여보, 난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선택할거야. 그런데 나랑 못살겠다는 당신의 말은 뭔 말이오?“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아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당신, 참으로 뭔가 착각하고 있네요. 혹 다시 태어난다면 당신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날 것이고, 특히 화장실 같은 사소한 문제도 해결 못하는 사람은 더욱 싫어요.” 거실에 울려 퍼지는 아내의 쌀쌀 맞은 목소리는 마치 서릿발 같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그저 아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찻잔 만 홀짝거렸습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아내의 말과 행동이 영 마음에 걸려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문득 오래 전 신문에서 보았던 70대 노부부의 ‘황혼 이혼’ 기사가 생각났습니다. 평생을 함께한 노부부가 이혼했다는 그 기사를 읽고 많이 놀랐었는데 ‘아, 그와 같은 일이 혹 나에게도 오려나?’조바심이 났습니다.

탁자 앞에 놓인 TV 리모컨만 이리저리 돌리던 아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내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덩그러니 혼자 앉아 거실 밖 베란다를 무심히 바라보니, 베란다에 놓인 서양 난이 때 이른 줄 모르고 꽃 몽우리를 터트린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노라니 아내를 처음 만났던 오래 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습니다. ‘그래, 그러고 보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무심했지. 유난히도 꽃을 좋아하는 아내가 이 난을 보면 뭔가 섭섭했던 속내도 털어놓지 않을까?’

내실로 들어가니 아내는 세상 모르게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잠든 머리맡에 조용히 앉아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보니 눈 밑의 주름이며, 귀밑에 하얗게 돋아난 흰머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피곤한 빛이 역력한 아내의 그런 모습을 뒤로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여보! 나에 대한 당신의 섭섭함이 그렇게 큰 줄 모르고 살았던, 나의 무심함을 뼈저리게 뉘우치며 몇 자 적소.’ 이렇게 시작한 편지의 말미에 베란다의 꽃 소식을 전하고 ‘죽어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할 것이오”란 글로 끝을 맺었습니다.

다음날 눈을 뜬 머리맡엔 다음과 같은 아내의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당신이 전해준 꽃 소식 고마웠고요. 간밤에 내가 당신께 한 말 섭섭했다면 미안해요. 그렇지만 당신도 내 마음을 조금은 헤아려 주었으면 하네요. 어머님 보내드리고 돌아 설 때 당신이 나에게 뭐라 했는지 기억하나요? 둘만의 좋은 시간, 그 말은 아니라도 빨리 건강했으면 하네요. … … 그리고 우리 여행가요.’

아내가 또박또박 써 내려간 편지 속엔 그 누구보다 사랑 한다는 말과, 나의 건강 때문에 늘 슬퍼했던 지난 이야기들이 구구절절 담겨 있었다. 오랜 세월 병환으로 누워계시다 세상 떠난 어머님의 뒤를 이어, 나 또한 아내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 주니 많이도 속상한 가 보다.

늦잠으로 아내가 차려 놓고 간 아침밥을 혼자 뜨며, ‘그래,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여보! 내 툭 털고 일어나는 날, 당신이 그렇게 가보고 싶다던 제주도로 함께 여행 갑시다’ 라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해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사실 아내와 난 신혼여행도 못간 부부입니다. 아내는 제주도가 남의 나라쯤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두 번씩이나 효부 상을 타고 그 부상으로 받았던 상금과 해외여행 티켓도 선뜻 어려운 이웃에게 보낸 아내가 정말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NGO 활동을 하는 아내는 오늘도 아침 일찍 몸이 불편한 독거노인들을 향해 집을 나선 터였습니다.

‘여보! 이 말은 못했구려. 역마살 끼어 온 천지 나만 좋아라 다닌 못난 이 사람을 용서 하구려. 그리고 담배 끊는 것은 꼭 약속하리다. 허나 힘없어 정조준이 안 되는 것이야 난들 어쩔 수 없지 않소?’ 앉아서 작은 일을 본다는 모 아우님이 문득 생각납니다. 아우님, 앉아서 보면 편하겠지요?

※ MBC라디오 표준FM(수도권 95.9㎒)

<여성시대> 에 소개된 사연 중 한 편을 매주 금요일 싣습니다.

경기 부천시 오정구 고강1동 - 채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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