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옥윤씨는 성격이 화끈하고 노래 잘하는 패티가 정말 마음에 들었고, 패티로서는 자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좋은 음악을 만드는 길옥윤씨가 좋았을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머니가 건강을 되찾으시고, 외국에서의 출연 계약도 지켜야 하고 해서, 패티 김이 출국을 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출국 날짜를 4월로 잡아 놓고 있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노래 ‘4월이 가면’이 등장을 한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 잠이 들면은 꿈 속의 사랑
사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 사랑 한다면 가지를 말어
날이 갈수록 깊이 정 들고, 헤어 보면은 애절도 해라.”
길옥윤씨는 이 노래를 패티에게 취입을 시키면서 결혼을 해달라는 프로포즈 송으로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패티 김에게, 이 노래가 프로포즈 송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나한테는 분명히 그렇게 얘기 했고, 나는 주간한국에 그대로 밝혔다. 패티가 이 노래를 취입했고, 방송에서 많이 소개가 되고, 일반 팬들의 반응이 엄청나게 좋았다. 성공적이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나 보고 약혼 발표식을 주선해달라고 했다. 약혼 발표식이란 신문ㆍ잡지 기자들과 방송 PD들 그리고 가까운 친지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하면서 약혼 사실을 공표하자는 것이다. 나한테 총연출과 기획을 맡긴 것이다. 난들 이런 일을 해 본적이 있나? 하지만 이왕 하는 것인데 멋 있게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약혼 발표식 장소는 조선호텔에 있는 ‘아리랑의 집(Arirang House)’이고, 점심시간에 하기로 했다. 이 아리랑의 집은 한옥으로 되어 있는 매우 운치 있는 한국 음식점으로 원구단 입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기자들과 PD들이 방안에 가득 앉아 있는 가운데 내가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사진 기자들은 열심히 사진 찍고, 취재 기자들은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고, 방송 PD들은 녹음 하느라고 바쁘고…. 질문 내용은 주로 “어떻게 만났느냐, 나이 차이는 어떻게 극복 하느냐, 아기는?” 등등이었다. 두 사람은 13살 차이였다.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앉아서 시종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질문에도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그런데 결혼식은 언제 할 것이냐는 질문이 나오니까, 길옥윤씨는 “날짜와 장소가 결정되는대로 정홍택씨를 통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양반은 결혼식 기획과 연출도 내게 맡길 작정이었던 것이다.
무슨 운명인지는 모르지만 길옥윤-패티 김 커플과 나는 그 후로도 여러 가지 사연을 함께 하게 된다. 결혼식은 그 해(1966년) 12월에 올리기로 했다. 장소는 전 해에 신성일-엄앵란이 식을 올렸던 워커힐 호텔의 패시픽 홀이다. 이 홀은 지금 없어지고 W호텔이 되어 있다. 주례는 김종필 총리, 결혼식 사회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씨가 맡기로 했다. 김종필 총리와 곽규석씨는 길옥윤-패티 김 커플과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결혼식 사회는 곽규석씨가 보지만 그날 오후에 있는 피로연 사회는 나더러 봐 달라고 길옥윤씨가 특별히 부탁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자, 이제는 청첩장을 찍어야 할 차례다. 2,500장인가, 3,000장인가를 인쇄했다. 청첩장은 4쪽으로 되어 있고, 맨 앞에는 신랑 신부 사진을 넣었다. 그때는 주례 이름, 사회자 이름, 청첩인 이름이 같이 인쇄 되었는데, 청첩인에 내 이름이 들어갔다.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팬들에게 전할 선물이다.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음악 선물이 제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길옥윤씨가 패티에게 처음으로 준 프로포즈 송인 ‘4월이 가면’을 45인치 도너츠판에 넣어서 선물로 했다. 청첩장과 도너츠판을 우리 집에 쌓아 놓았는데 방으로 하나 가득이었다. 우편 사정이 지금처럼 좋지도 않고,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청첩장 주소 쓰고 우표 붙이고 우체국 가서 보내고 하는데 10일 이상 걸렸다.
막상 결혼식 날이 되었다. 워커힐이 가득 찰 정도로 팬들이 몰려와서 조금 늦게 온 하객들은 식장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물론 준비한 선물도 모자라고….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시작 되었다. 나는 식사할 사이도 없이 사회를 봤다.
결혼식을 성대하게 마치고 두 사람은 달콤한 신혼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패티 김은 수 많은 노래들을 취입하게 된다. ‘사랑하는 마리아’ ‘사랑이란 두 글자’ ‘서울의 찬가’ ‘그대 없이는 못 살아’ ‘9월의 노래’ ‘초우’ ‘못 잊어’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드라마 <남과 북> 의 주제가) ‘사랑은 영원히’(동경 가요제 출품작) 등등…. 남과>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하던 중 갑자기 일본에 있는 어떤 사람이 나한테 깜짝 놀랄 만한 정보를 보내 왔다. “일본 주간 잡지에 패티 김의 누드 사진이 실렸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이건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확인해 본 결과 <주간대중> 이라는 일본 잡지에 수영복을 입고 찍은 전신사진이 실렸는데 하필이면 그 수영복이 살색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사진을 급히 입수해서 주간한국에 실었다. 그래서 일단 해명이 되었다. 주간대중>
패티 김과 길옥윤씨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결혼하고 사오년 후부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야간업소에서 매일 밤 연주를 해야 하고, 마음 약하고 사람 좋은 길옥윤씨는 손님들이 주는 술을 거절 못해서 만취하게 되고 해서 자연히 불만이 생기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부부끼리의 일을 누가 깊이 알 수 있을까.
두 사람은 갑자기 별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길옥윤씨는 나한테 본격적인 재즈 공부를 하기 위해 뉴욕에 간다고 했다. 나는 벌써 눈치를 챘다. 그는 실제로 뉴욕에 갔고, 그 곳에서 나한테 여러 번 전화를 하기도 했다. 패티를 진실로 사랑한다며 전화 저 편에서 울기도 했다. 나는 패티 김을 여러 번 만나서 마음을 돌려 보려 하기도 했다.
이 무렵에 나온 노래가 ‘이별’이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길옥윤씨가 패티에 대한 마음을 노래로 대신 한 것이다. 처음 만날 때 준 노래가 ‘4월이 가면’이고, 헤어질 때 준 노래가 ‘이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국 그들은 이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내가 또 등장을 한다. 이혼 발표식을 하고 싶은데 나보고 섭외와 사회를 맡아 달라는 얘기다.
이혼식(?)은 약혼 발표를 했던 조선호텔에서 했다. 방안을 가득 메운 기자들과 PD들이 많은 질문을 했지만 이 둘은 그냥 “성격 차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포옹을 하고 눈시울을 적신 채 헤어 졌다.
나는 지금도 기가 막힌다. 이 두 사람과 무슨 질긴 인연이기에 약혼 발표식을 주선하고 사회를 보고, 결혼 청첩인이 되어 청첩장을 돌리고, 결혼 피로연 사회보고, 기어코 이혼 발표식 사회까지 봐야 했는가 말이다.
다음주 화요일 22일자에는 김지미씨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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