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가족 여러분, 20년 전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인정 받는 날 모든 영광과 결실은 여러분의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정말 미안합니다." 20년여 만의 퇴장엔 아주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가 걸어 온 '삼성 20년'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제2창업에서 신경영 선언까지 1987년 12월. 이건희 회장은 고 이병철 선대 회장의 타계로 45세의 나이에 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동양방송, 중앙일보, 삼성물산 등을 거치며 20년 이상 차근차근 경영 수업을 받은 후였다.
이듬해 3월, 이 회장은 삼성 창립 50주년을 계기로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이건희 식 경영'의 시작이었다. 그는 '세계초일류 기업으로 도약'이라는 그룹의 21세기 비전과 함께 '조 단위 순이익 실현'을 약속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전 계열사 순이익을 합쳐도 조 단위는 커녕1,000억원대를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그는 다시 강도 높은 처방을 내놓았다. 93년 6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이른바 신경영 선언이었다. LA-도쿄-런던-프랑크푸르트 등 두 달 가량 해외 사업장을 순회한 뒤 내린 처방이었다. 양 중심에서 질 중심으로 경영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것이 신경영의 골자였다. 이 회장은 이후 한 기고에서 "질 위주의 경영을 끊임없이 강조했지만 경영 관행은 여전히 양적 기조를 벗어나지 못했고, 대단히 위험한 타성이 그룹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과감한 투자와 결단력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반도체 사업이었다. 반도체 선발업체들이 셀(cell)을 기판 아래로 쌓는 트렌치 방식을 고집할 때 그는 위로 쌓는 스택 방식을 택했고, 일본 경쟁업체들이 불황을 우려해 설비투자를
축소할 때 오히려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16메가 D램 개발(1990년 8월)을 시작으로 '세계 최초' 행진을 이어가며 삼성전자를 세계 최대 메모리반도체 기업으로 굳건히 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준비 경영, 인재 경영, 그리고 창조 경영
그의 20년은 파괴와 도전의 역사였다. 외환 위기 이후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골몰하던 이 회장은 각 계열사 사장단에게 "5년 뒤, 10년 뒤에 무엇을 먹고 살 것인지 고민해 보라"는 과제를 던졌다. 당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고 있었지만, "현재
실적에 자만하고 있다가는 언제 위기에 빠질 지 모른다"며 '준비 경영'의 화두를 던진 것이다.
계열사들은 미래 환경 변화를 예측해 새로운 사업 구조를 그려보고, 또 전략을 구상하는데 골몰했다. 하지만, 이 회장이 제시한 답안은 뜻밖에 '인재'였다. "변화가 빠른 사회에서는 10년 후를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환경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인재를 많이 확보해 두고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성장 정체가 지속되고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자 이 회장은 다시 긴급 처방을 들고 나왔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는 이른바 '샌드위치론'이었다. 그가 이번에 꺼내 든 화두는 '창조 경영'이었다. "20세기에는 물건만 잘 만들면 1등이 됐지만 지금은 품질에 별 차이가 없다. 21세기는 여기에 디자인, 마케팅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 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다시 초일류 기업을 향해
이 회장의 리더십은 20년 새 '한국의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 발돋움시켜 놓았다. 20년 전 17조원이었던 매출액은 9배에 달하는 152조원(2006년 기준)으로 확대됐고, 2,700억원에 불과했던 세전 이익도 14조2,000억원으로 50배 이상 불어났다.
이런 탁월한 경영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비등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 특검은 그 결정판이었다. 수십년간 재벌의 대명사로 군림해 온 '삼성 공화국', 총수 1인이 그룹 경영을 좌지우지하는 '황제 경영' 등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편법 배정 등 정당한 대가 없이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해 스스로 비난여론을
자초한 측면도 물론 없지 않다.
이제 이 회장이 못 다 이룬 '세계 초일류 기업' 약속은 삼성 임직원들의 몫으로 남겨지게 됐다. 이번 경영 쇄신안이 그 시발점이 돼야 한다는 주문이다.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발표문
저는 오늘 삼성 회장 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 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 안고 가겠습니다.
그 동안 저로부터 비롯된 특검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사과 드리면서 이에 따른 법적 도의적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삼성가족 여러분 20년 전 저는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인정 받는 날, 모든 영광과 결실은 여러분의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정말 미안합니다.
국민 여러분께 간곡히 호소합니다. 오늘날의 삼성이 있기까지는 무엇보다 국민 여러분과 사회의 도움이 컸습니다. 앞으로 더 아끼고 도와 주셔서 삼성을 세계 일류기업으로 키워 주시기 바랍니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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