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황제경영’ ‘제왕적 오너’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의 절대적 카리스마는 분명 타 총수들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삼성을 글로벌 스타기업으로 끌어올린 이 회장의 리더십은 부친이자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마저 넘어선다는 평가였다.
이 회장의 경영일선 퇴진선언은 그래서 더 충격적이다. 삼성 내부는 물론 밖에서 조차 ‘이건희 없는 삼성이란 그림 자체가 그려지지 않는다’는 반응들이다.
▲ 왜 퇴진인가
그룹 전략기획실 해체,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의 퇴진, 차명재산의 공익적 활용 등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이 회장의 완전퇴진은 확실히 의외다. 지난 11일 특검 조사후 이 회장이 준비된 메모를 통해 “나를 포함한 경영쇄신을 깊이 고려하겠다”고 말했을 때조차, 대부분 실제 퇴진에 대해선 반신반의했다. 그룹측의 공식부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회장 없는 삼성’을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은 퇴진을 택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던 것 같다.
첫째, 의혹제기→검찰수사→사과 및 재산헌납으로 되풀이되어 온 악순환의 고리를 이번만은 확실하게 끊어야겠다는 의지다. 경험칙상 사재헌납 정도로는 국민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터. 결국 가능한 최대치의 ‘초강수’만이 근본 해결책이라고 판단한 듯 싶다. 한 삼성관계자는 “이 회장으로선 버릴 수 있는 것은 다 버렸다. 이래도 미흡하다고 한다면 정말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둘째,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의미다. 이 회장과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 및 일부 CEO들의 퇴진은 삼성 수뇌부의 물갈이인 동시에, 결과적으로 ‘이건희 세대’의 퇴장을 뜻한다. 삼성측은 앞으로 ‘전문경영인 중심의 계열사 독립경영시스템’을 언급했지만, 이는 향후 ‘이재용 체제’로의 연착륙을 위한 과도기적 성격이 짙어 보인다. 비록 이 전무가 ‘해외사역’에 나서야 하는 탓에 경영승계 스케줄엔 차질이 생겼지만, 어쨌든 삼성은 이번 쇄신을 통해 ‘세대교체’를 하게 됐고 이 점에서 ‘이재용 시대’는 본막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리허설 정도는 시작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이 모든 짐을 안고 떠나면 이재용 전무는 그만큼 홀가분해진다. 세금 다 내고 경영수업까지 끝난 실질적 리더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고 말했다.
▲ 그래도 위기는 위기
문제는 비즈니스다. 이 회장 없이 삼성이 과연 잘 굴러갈 수 있을지가 핵심이다. 삼성의 글로벌 비즈니스에 한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나라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협력업체를 합치면 삼성이 먹여 살리는 식솔만 수백만명이다.
이 점에서 삼성은 아주 독특한 경영구조와 문화를 갖고 있다. 총수 개인의 힘이 가장 막강한 그룹인 동시에 경영시스템이 가장 공고한 그룹이기도 하다. 오너경영과 시스템경영은 통상 상충되는 개념이지만, 삼성에서 만큼은 두 가지가 철저하게 함께 굴러가고 있다.
예컨대 전략 기획실을 대체할 사장단 협의회, 엄격하기로 소문난 인사ㆍ평가ㆍ보상시스템, 수많은 주주 및 고객들을 상대했던 노하우 등이 삼성엔 축적되어 있다. ‘글로벌 삼성’을 지탱해온 이 체계적 경영시스템은 이 회장의 공백을 메워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 회장 역시 “나 없이도 삼성은 굴러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퇴진을 결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희 있는 삼성’과 ‘이건희 없는 삼성’은 분명 다르다. 최첨단 자동항법시스템을 갖춘 초대형선박라도, 선장이 있느냐 없느냐는 천지차이다. 이 회장은 물론 ‘컨트롤 타워’였던 전략기획실마저 해체됨으로써 ▲ 신속하고 효율적인 투자결정 ▲ 통합적인 삼성브랜드 관리 ▲ 계열사 및 임직원들의 엄격한 기강유지 등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일각에선 “오너 결단 없이 큰 돈이 드는 신규사업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이 회장의 부재로 계열사 경영이 현실안주적으로 지나치게 보수화되고 특히 미래 삼성을 먹여 살릴 신수종 사업 차질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런 걱정을 반영하듯, 삼성 주가는 이날 일제히 하락했다. 한 애널리스트는 “투명경영이 장기적으론 호재지만 이 회장의 퇴진은 단기적으론 분명 악재”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삼성전자 등 주요 계열사 본사와 해외사업장에는 거래처로부터 우려 섞인 문의가 잇따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 고위관계자도 “일단 퇴진발표는 했지만 솔직히 경영상의 결과는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현재로선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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