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밖이었다. 푸석한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방문 전,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던 밝은 음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20일 오후 5시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 “대표이사라는 직함은 아직 생소합니다. 작은 체구에 큰 옷을 걸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일본에서 건너온 바이어들을 상대하느라 씨름 했던 지난 주까지도 내내 그랬으니까요.”
디자인 컨설팅 전문 벤처기업인 ‘바조’(VAZO)의 최고경영자(CEO)이자, 최고기술경영자(CTO)를 맡고 있는 박승복(26) 대표이사. 회사 문을 연지도 9개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대표이사라는 직함이 영 익숙치 않은 모양이다.
“나이로 따지면 사내에선 제가 제일 막내예요.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분과는 10년이나 차이 나거든요. 모두 한참 형님 뻘이죠.” 그는 벤처기업 대표 이전에 학생(연세대 산업공학부 2년 휴학) 신분이다.
나이는 20대이지만 사실 박 대표는 이쪽 계통에선 유명인사다. 2000년 국가대표로 뽑혀 ‘세계발명두뇌올림픽대회’에 출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상을 수상한 그는 같은 해 전국학생발명올림픽대회에서 교육부총리상을 받았다.
이어 2002년엔 ‘21세기를 이끌 우수인재(발명 부분) 대통령상’을, 2007년에는 전국대학발명경진대회 대상 국무총리상을 획득하는 등 각종 국내 발명대회에서 크고 작은 상을 휩쓸었다. 자동안내방식을 이용한 114 서비스 시스템 등을 포함해 그가 보유하고 있는 특허만도 6개다.
“거창한 신제품 보다는 일상생활 속에 사용하고 있는 제품들을 세련된 디자인으로 만들어 소비자들이 합리적인 가격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저희 회사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학과 지도교수는 물론이고 친지들이 십시 일반으로 창업 자금을 모으는데 동참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벤처기업을 차린다는 건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주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벤처 창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은 어엿한 벤처기업 대표로 성장했지만 박 대표의 학창 시절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대기업에 다니시던 아버지가 중학교 1학년 때 외환위기 여파로 회사를 그만 두고 집을 떠나면서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어요.” 사춘기 때 갑작스럽게 찾아온 충격은 이내 방황으로 이어졌다. “친구들과 다투다 주민 신고로 경찰서에도 끌려가고 불법 복제한 게임 CD를 친구들에게 팔다가 걸려서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아보기도 했죠.(웃음)” 박 대표는 사고뭉치(?)로 지냈던 기억들을 이렇게 더듬었다.
그를 방황하게 만든 것이 어려웠던 집안 사정이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발명에 열중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도 힘들었던 가정 형편과 무관치 않다. “남들과 똑 같이 하는 건 제 성미에 차지 않았어요. 평소에 발명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거든요. 집안 형편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멈춘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습니다.”
아파트 공사현장의 막일에서부터 신문배달은 물론이고 찹쌀떡 장사에서 전단지 배포까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생활비를 해결하고 나니 오히려 발명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뿌듯하기도 했고요.” 자칫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던 어려운 시기를 그는 기회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사업은 이제 본궤도에 오르고 있다. 바조의 올해 매출 목표는 50억. 현재 세계 10여개국에서 바조의 신상품에 관심을 보이며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사회적 통념상 사실 어린 나이이지만 이미 경영측면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사사로운 욕심을 낼 법도 하지만 박 대표의 소망은 어른스럽다. “지금까지 도움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런가 봐요.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게 제 꿈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상상만해도 행복하거든요.” 20대 청년의 당찬 꿈이 하나둘 영글어 가고 있는 모습이 기대된다.
허재경 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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