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전 6시30분, 서울 구로구 구로동 남구로역 3번 출구 앞 인력시장. 날이 훤히 밝았지만 김상현(54ㆍ가명)씨는 결국 오늘도 ‘선택’ 받지 못했다. 새벽 5시도 되기 전에 도착해 길가를 서성이기를 수차례. 인부 선택권을 쥔 작업 반장들은 힐끗 바라보기만 할 뿐 끝내 “같이 갑시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보다 늦게 나온 조선족 몇 명은 쉽게 작업 현장으로 떠나는 승합차에 올라탔다. 건설 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사실을 김씨도 모르는 바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닷새 연속으로 일을 잡지 못한 건 지난해부터 부쩍 늘어난 조선족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실제로 일용직 인력을 즉석에서 고용하는 수도권 곳곳 인력시장에서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조선족에게 밀려나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2004년까지만 해도 건설업에 취업한 조선족 등 동포 인력은 2,500여명에 불과했으나, 2005년 이후 매년 1만8,000명에서 2만4,000여명의 인력이 추가로 흘러 들고 있다.
김씨가 발길을 돌린 남구로역 인력시장 역시 최근 조선족 노동자비율이 전체 인력의 50%까지 높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3~4년전 만해도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했던 그들이다. 가뜩이나 건설 경기가 나빠져 일자리가 없는데, 인력 공급은 두 배나 늘었으니 일자리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어엿한 중소기업 사장이던 김씨는 인력시장에 나올 때마다 일용직 노동자에게는 점점 더 불리해지는 현실을 체감한다. 김씨는 “한국인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조선족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잡부’ 신세를 면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잡부보다 일당이 비싼 도배, 목공, 철골 기술자가 되려면 최소 6개월간은 헐값 일당을 감수하며 조수로 일해야 한다. 하루 1만~2만원이 아쉬운 그에게는 엄두도 못낼 일이다. 김씨는 “가족이 없는 조선족 동포들은 5만원만 받고도 기술을 배우는 경우가 많다”며 “오히려 조선족 작업반장이 한국인 노동자를 부리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고 말했다.
물론 억척스럽게 적응하는 조선족의 현실을 인정하기는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사 현장의 불법체류자를 단속하지 않는 정부가 원망스럽다. 팀을 이뤄 다니는 조선족 노동자들은 손쉽게 일감을 얻는다. 개별 행동을 하는 한국인 노동자와는 차이가 있다. 척 봐도 불법 체류자 같은데 단속 받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김씨는 “등록증을 갖고 있지 않은 조선족 동포가 적발돼도, ‘현장사무소에 등록증이 있다’는 팀장의 말 한 마디면 그 다음부터는 팀 전체가 무사통과 되는 실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불법이라고 해도 버티면 그만이라는 건데, 그러니까 불법 체류자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 아니냐”고 푸념했다.
경제적 처지만 따지면 김씨는 10여년 만에 중산층에서 최하층으로 추락했다. 외국인 노동자가 급증하면서 현장에서 이들과 접점을 이루는 최빈 계층의 생활이 갈수록 위협을 받고 있다는 얘기다.
김씨는 “덮어 놓고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건지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정오까지 인력시장을 떠나지 않았지만, 끝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강희경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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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통하고 싸고" 건설현장 中동포 환영
외국인 노동자의 합법적 입국 통로는 2004년 8월부터 시행 중인 ‘고용허가제’를 통한 경우가 유일하다. 고용허가제는 순수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 고용허가제’와 외국 국적 동포의 고용을 허가하는 ‘특례 고용허가제’로 나뉜다. 고용허가를 받은 외국 국적 근로자가 일할 수 있는 업종은 제조업, 건설업, 농축산업, 서비스업, 어업 등 5개 업종이다.
원칙적으로 고용허가제가 한국인 노동자의 일자리를 잠식할 여지는 크지 않다. 고용허가제 도입 취지가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인해 국내에서는 사람을 구하지 못한 기업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가 직장을 중도에 바꿀 수 없도록 한 점도 일자리 다툼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이다.
그러나 이런 안전장치에도 불구, 건설업과 서비스업에서는 내국인 일용 근로자와의 갈등이 구조적으로 불가피한 상황이다. 제조업, 농축산업에 비해 임금도 높고 근무여건도 좋아 조선족의 선호도가 높아진 탓이다. 특히, 지난해 3월 국내에 연고가 있는 동포에 대해서는 무조건 입국을 허용하는 ‘방문취업제’가 시행된 뒤에는 갈등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방문취업제’ 이후 일반 고용허가제(순수 외국인) 입국자는 3만3,687명에 불과한 반면 특례 고용허가제(해외 동포)는 11만명을 넘어섰는데, 11만명 가운데 무려 8만명 가량이 건설현장과 서비스업으로 몰렸다.
요컨대 최근 부쩍 심각해진 한국인과 조선족 동포와의 일자리 갈등은 가격 경쟁력 면에서 유리한 조선족 인력의 공급이 그만큼 늘었던 게 원인인 셈이다.
실제로 한 관계자는 “동포 노동자는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으면서도 한국 노동자보다 일당이 1만~3만원 가량 낮다”며 “일자리가 한정된 상황이라면 동포 노동자에게 우선권이 돌아간다”고 말했다.
이영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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