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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9> 잇바디-눈 속의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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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9> 잇바디-눈 속의 매화

입력
2008.04.2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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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齒牙)는 척추동물의 위턱과 아래턱에서 입 안으로 돋아나 음식물을 씹어 끊거나 으깨는 일을 하는 기관이다. 다른 말 뒤에 붙어 합성어를 이룰 땐 '니'로 적는다. 젖니(乳齒: 배냇니), 간니(永久齒 또는 代生齒), 덧니, 벋니(뻐드렁니), 옥니, 앞니, 송곳니, 어금니, 엄니, 사랑니, 윗니, 아랫니 따위가 그 예다. 북한의 철자법은 이형태를 인정하는 데 인색해서, 이런 경우에도 '이'로 적는다.

'이'는 또 톱날이나 기계의 뾰족하게 내민 부분을 가리키기도 하고(이런 의미는 유럽어를 베껴 옮기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사기그릇 따위의 아가리가 잘게 떨어져나간 부분을 가리키기도 한다. 톱니바퀴나 '이 빠진 접시' 같은 표현에서 그런 뜻의 '이'가 보인다.

이빨은 '이'의 낮춤말이다. '이'와는 달리 다른 말 뒤에 붙어 합성어를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송곳니, 어금니, 덧니 따위를 송곳이빨, 어금이빨, 덧이빨로 바꿔 말할 수 없다. 반면에 이빨을 '이'로 대신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빨이, 속어로, 말주변이나 허풍을 뜻할 때 그렇다. "그 친구 이빨이 정말 세!"라거나 "이빨 좀 그만 까!" 같은 문장에서 '이빨'을 '이'로 바꾸면 뜻이 달라져버리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는 중세한국어로 '니'였다. 이빨, 잇바디, 잇몸 같은 말들도 닛발, 닛바대, 닛므윰 같은 형태를 취했다. 이 합성어들의 뒷부분을 이루는 형태소들('발', '바대', '므윰')의 뜻은 지금 정확히 알 수 없다. '닛므윰'의 '므윰'만 하더라도, 그것이 '몸'을 뜻했던 것은 아니다. 현대어 '몸'은 15세기 한국어로도 '몸'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잇몸이라 부르는 치경(齒莖)은 <훈민정음언해> 에서 '닛므윰'으로 나타난 이래 닛?事? 닛?乍? 닛?事? 닛므음, 닛무음 등으로 형태를 바꿔왔는데, 이렇게 형태가 변하면서 그 뜻이 불분명해지자 언중이 이 말을 '니(齒)의 몸(身)'으로 해석해 '닛몸' '잇몸'을 출현시켰다는 것이 국어사학자들의 견해다. 민중어원이 이런 식으로 낱말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일은 언어사에서 드물지 않다.

중세 한국인들은 치경을 '닛집'이라고도 불렀다. '이의 집'이라는 뜻이니, 잇몸만큼이나 꾸밈없는 이름이다. 닛므윰의 '므윰'처럼, 닛발(이빨)이나 닛바대(잇바디)의 '발'이나 '바대'도 명확한 뜻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저, 사물이 가지런히 뻗어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라 짐작할 뿐이다.

이빨을 서북방언으론 '니빠디'라 하고 남부 방언으론 '이빠지'라 하는데, 둘 다 형태적으로 잇바디를 닮은 게 흥미롭다. 실제로, 이 말들은 의미를 떠나서 '잇바디'의 지리적 변이형들인지도 모른다.

치열교정, 고대로마 때부터 시도돼

잇바디는 이가 박힌 줄의 생김새를 뜻한다. 한자어로는 치열(齒列)이다. 그 횡단면이 활 모양으로 생겼다 해 치열궁(齒列弓: dental arch)이라고도 한다. 잇바디는 입맵시를 떠받치는 허우대다. 고운 입매의 큰 부분은 가지런한 잇바디에서 나온다.

스스럽게 미소짓는 조콘다 부인(모나리자)의 다문 입 뒤엔 그 입매만큼이나 단정한 잇바디가 숨어있으리라. 치열교정이 이미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시도된 것도, 현대의 치과병원이 주로 치열교정에서 큰돈을 벌어들이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가지런한 잇바디는 진주알을 꿰어놓은 듯도 하고, 두 줄 남겨놓은 옥수수 알 같기도 하다. 시서화(詩書畵)에 두루 뛰어나 당대인들이 삼절(三絶)이라 일컬었던 15세기 사람 강희안은 봄눈 위에 핀 매화를 잇바디에 비유한 바 있다. "눈 온 뜰에 몰래 든 봄, 잇달아 피는 매화/ 말없이 웃고 섰는 하얀 그 잇바디여!/ 달 지고 별 비낀 이 밤 날 시름케 하누나."

사실 이 노래는 칠언절구 한시다. 다시 말해 네 구로 이뤄져 있다. 이것을 세 행(3장)의 시조 풍으로 옮겨놓은 이는 한학자 손종섭 선생이다. (손종섭 편역 <내 가슴에 매화 한 그루 심어놓고> 참조)

가지런하고 하얀 이는 미인의 상징

잇바디가 거론되는 둘째 행은 본디 셋째 구로, 그 원문은 "齒然索笑无言語"다. 역자가 '하얀 그 잇바디'라 옮긴 것은 결국 '치(齒)' 한 자인 셈이다. 게다가 손 선생은 <매화(梅)> 라는 밋밋한 원제마저 '하얀 그 잇바디'로 바꾸었으니, 이 서늘하고 낭만적인 작품은 강희안의 것 이상으로 손종섭의 것이기도 하다.

대가의 솜씨로 이렇듯 '부정(不貞)한 미녀(belle infidele)'를 빚어놓은 뒤, 역자는 "아닌밤, 고운 잇바디의 하얀 웃음으로 말없이 다가온 미인! 그 뇌쇄(惱殺)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작자!"라 그 감상을 적어두었다.

상상 속의 잇바디, 먼 곳의 고요한 잇바디도 느꺼움의 싹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너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의 잇바디 아리땁구나/ 전화선의 긴 그림자 금을 옮기는/ 달빛 아래/ 포석 위에/ 반쯤 베어먹힌 쥐의 몸통처럼/ 없는 머리가 자꾸 아프고/ 없는 얼굴로 흐느껴졌다"고 황인숙은 <혼선--바람 속의 침상> 에서 노래한다. 병적인 아름다움이고, 병적인 미감이다. 강희안과 황인숙의 견해가 만나는 곳: 말없는 잇바디가 아름답다.

내 기억 속에 박혀 있는 잇바디 가운데 정다운 것 하나는 미국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의 것이다. 벌린 입술 사이로 살짝 드러나곤 했던 그의 잇바디는, 넉넉한 미소와 어우러져, 비록 실패했으나 그냥저냥 떳떳했던 그의 도덕정치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가지런한 잇바디만 아리따운 것은 아니다. 덧니의 아리따움도 있다. 사팔눈이 때로 아름답듯, 덧니도 때로 아름답다. 파격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바로크적 매력이다. 덧니는 그 어긋남과 포갬을 통해 미적 역동성과 개성을 획득한다.

이천삼백 년 전 사람 굴원이 엔터테이너들의 주순호치(朱脣皓齒)를 기리고 천삼백 년 전 사람 두보가 양귀비의 명모호치(明眸皓齒)를 그렸듯, 하얀 이는 예로부터 미인의 상징이었다.

텔레비전의 치약광고 모델들은 가지런한 잇바디만이 아니라 새하얀 이를 뽐낸다. 적잖은 치과병원들이 '치아미백클리닉'을 겸한다. 새하얀 이를 향한 욕망은, 폐암의 공포만큼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의 금연 의지를 떠받친다.

이도 조음기관 love의 끝소리는 순치음

혀만큼 결정적이진 않지만, 이도 혀처럼 조음기관이다. 한국어 '사랑'의 첫소리는, <훈민정음> 의 용어를 빌리자면, 치음(닛소리)이다. 'ㅅ' 글자 자체가 사람의 이 모양을 본떠 만든 것이다. 영어 love의 마지막소리는 순치음(脣齒音)이다. 이 소리를 내려면 윗니를 아랫입술에 마찰시켜야 한다. 단순호치의 미녀들이 으스대기 위해 부러 낼 만도 할 소리.

혀만큼 결정적이진 않지만, 이도 혀처럼 펠라티오 같은 구강성교에 쓰인다. 구강성교가 아니더라도, 성적 열정은 흔히 이로 표현된다. 격렬한 섹스가 사람 몸에 남기는 잇자국을 영어 화자들은 '사랑에 물린 상처'(love bite)라 부르지 않는가.

'젖니'(영어로는 milk teeth, 프랑스어로는 dents de lait)는 유럽어를 곧이곧대로 베낀 말이다. 반면에 유럽인들이 '지혜의 이'(영어로는 wisdom teeth, 프랑스어로는 dents de sagesse)라 부르는 것을 우리는 '사랑니'라 부른다.

살짝 비틀어 옮긴 것일 테다. 일본사람들은 '지시(知齒)' 또는 '지에바(知惠齒)'라고 곧이곧대로 옮겼다. (우리가 보통 智慧로 표기하는 말을 일본인들은 흔히 知惠로 표기한다. 본디 智慧였던 것을 뜻이 통하는 글자들로 간이화한 것이다.)

사랑에 눈뜰 때 사랑니의 치통도 함께와

사랑니를 일컬을 때 일본사람들이 더 흔히 쓰는 말은 '오야시라즈바'(또는 줄여서 '오야시라즈')라는 고유일본어다. '오야시라즈'는 '친부모(의 얼굴)를 모른다'는 뜻이고, '바'는 '이'를 뜻하는 '하'의 이형태다. 친부모를 모르는 이? 나이 들어서 난데없이 돋아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일까? '오야시라즈'는 또 몹시 험한 벼랑이나 파도가 거센 해안을 가리키기도 한다.

친부모도 돌볼 수 없을 만큼 위험한 곳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야시라즈바'라는 명명은 사랑니가 돋아나려 할 때의 극심한 통증에서 착상한 것일까? 모르겠다. 이 말의 유래를 아시는 분이 계시면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일본사람들을 따라 한국사람들도 더러 지치(智齒)라는 말을 쓰긴 하지만, 이 말에는 젠체하는 분위기와 구닥다리 느낌이 있다. 사랑니라는 말이 훨씬 보편적이다. 서양사람들이나 일본사람들이 철들 무렵, 한국사람들은 사랑에 눈뜬다. 잇바디의 활을 마무르면서. 그 사랑은 흔히 치통과 함께 온다. 한국인에게 첫사랑은 아픔이고 철듦이고 지혜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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