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ㆍ김라합 옮김/문학동네 발행ㆍ384쪽ㆍ1만1,000원
한번 손에 들면 끝을 볼 때까지 놓기 힘든 소설이다. 읽는 이의 ‘엿보기 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다니엘 글라타우어(48)가 쓴 이 작품은 온통 30대 남녀가 주고받는 이메일로만 이뤄져 있다. 소설 읽기=이메일 훔쳐보기인 셈이다.
엿보는 입장인 만큼 단편의 정보들을 부지런히 모아 등장인물과 상황을 파악하는 수고는 감수해야 한다(물론 수고라기보단 퍼즐 맞추기의 재미에 가깝다). 돌아가는 상황을 빨리 꿰찰수록 서른넷 웹디자이너 ‘에미’와 서른여섯 언어심리학 교수 ‘레오’의 밀고당기는 심리전의 묘미를 더 많이 만끽할 수 있다.
(에미가) 잘못 보낸 메일을 계기로 관계를 트게 된 두 사람은 자기 처지는 감추고 상대 사정은 더 알아내려는 탐색전을 편다. 둘이 ‘식별놀이’라 이름 붙인, 붐비는 카페에서 각자 재주껏 서로를 찾아보는 유희를 즐긴 후 이 유부녀와 총각의 관계는 한층 가까워지고, 그래서 위태로워진다.
아기자기한 말놀음으로 꾸려지던 안단테(‘느리게’를 뜻하는 음악 용어)풍 이야기는 ‘식별놀이’를 분수령 삼아 알레그로시모(아주 빠르게)의 격정으로 서서히 치달아간다. 레오는 에미의 남편과 아이들을 의식하면서, 에미는 레오가 그저 메일함 속 연인일 뿐이라 여기며 자기 감정을 다스리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에미가 절친한 친구 ‘미아’를 레오에게 소개시켜 주면서 생긴 소동은 숨기려던 서로의 애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되고 만다. 하지만 그 사랑의 대상이 쌓아온 메일과 자기 연민을 질료 삼아 꾸며낸 허상임을 알 만큼 둘은 현명하다. 상대를 만남으로써 그 허상을 실체로 치환하기엔 둘의 무모함이 모자라다.
현실과 윤리에 단단히 붙박인 존재들이 꾸는 일탈의 꿈, 이 지극한 통속을 결코 뻔하지 않게 변주해낸 소설이다. ‘서간체 소설’이라는 시선 끌기에 유리한 형식을 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론 (독특한 형식에서 비롯되기 쉬운) 단조로움의 함정을 영리하게 피하면서 두 남녀의 굽이치는 욕망을 묘파한 작가의 장인적 솜씨 덕분이다. 내용(인간 심리)과 형식(이메일 소설)을 완벽하게 장악한 결과다. 짐작한 방식이지만, 짐작과는 다른 멜랑콜리를 선사하는 끝맺음이 소설의 여운을 더한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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