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남미 페루의 한 요리학교에 등장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화제가 됐다. 모양과 색깔이 다른 18종의 감자로 만든 높이 2.5m 트리다. 안데스 산맥 고원의 티티카카 호수 주변이 원산지로 알려진 감자는 8,000년 전부터 인간이 재배해온 페루의 대표적 작물. 평소에도 감자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온 이 학교가 특별히 트리를 생각한 것은 유엔이 2008년을 ‘감자의 해’로 정한 까닭이다.
학교로선 성탄 분위기를 이용해 국가의 특산물을 세계에 널리 알리려고 이벤트를 기획했겠으나, 유엔이 감자에 담고자 한 메시지는 우울하고 비극적이다.
▦ 쌀 밀 옥수수 등과 함께 세계 4대 작물로 꼽히는 감자는 식용 가능한 부분이 작물 몸체의 85%나 돼 ‘신이 내린 선물’로 불린다(쌀 밀 등 다른 작물은 50% 수준). 그래서 옛날부터 구황(救荒)작물의 으뜸이었다. 개도국과 저개발국이 세계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도 특징이다.
그러나 감자는 풍요와 결핍의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다. 19세기 중반 아일랜드에 잇단 감자 흉작에 따른 대기근이 발생해 인구의 4분의 1이 숨지고,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먹을 것을 찾아 미국 이민선을 탄 까닭이다. 인류의 이주역사에 획을 그은 사건이다.
▦ 유엔이 감자를 앞세워 경고했던 식량위기가 현실화하며 선ㆍ후진국 가릴 것 없이 지구촌 곳곳에서 ‘굶주린 아우성’이 폭발하고 있다.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의 수요증가와 기후변화에 따른 작황부진, 식량의 바이오연료 전용 급증, 투기세력 개입 등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다.
식량가격이 3년새 2배나 폭등한 것은 물론이고, 돈을 주고도 구할 수가 없다. 급기야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지난 주 “저개발국 국민 1억 명이 추가로 비참한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며 “지금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시기”라고 역설했다.
▦ 그가 주창한 세계적 차원의 ‘식량 뉴딜(New Deal for Global Food)’은 과거 대공황 극복을 위해 도입했던 새로운 정책조합과 같이, 빈곤국 식량위기의 안정적 극복을 위해 돈과 농업기술을 패키지로 지원하자는 것이다. 이미 세계은행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등 국제기구와 미국 등 선진국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졌으면서도 쌀을 제외한 식량 자급률이 5%에 불과한 우리나라는 앞뒤로 짚어볼 점이 많다. 쇠고기 시장 개방으로 공황상태에 빠진 축산농가의 처지는 빈곤국의 식량부족 고통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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