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방 하원의원으로 미국의 중앙 정치무대에 진출하기로 결심한 것은 1992년 2월 초순이었다. 당시 나는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있는 다이아몬드 바(Diamond Bar)라는 인구 8만의 작은 백인 도시 최초의 아시아계 시장으로 선출돼 1년 간 재직하면서 나름대로 행정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다. 한국인 이민 사상 최초의 시장이었다.
지방의 작은 도시였지만 행정 책임자로 일하다 보니 차츰 정치에 대한 안목이 생겼고, 또 좀더 큰 정치무대에 관심과 흥미도 커지면서 인구 60만명을 대변하는 미 연방하원의원에 진출해 보고 싶은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캘리포니아주의 인구가 해마다 늘어나 연방 하원의원 의석이 두 자리 늘게 됐기 때문이다. 한 석은 북가주, 또 한 석은 남가주, 그 것도 내가 시장으로 있는 지역에 배정됐는데, 현역 의원이 없는 새로운 지역구여서 미룰 수 없는 좋은 기회였다. 출마를 결심하고 나니 미국 역사상 최초의 한국계 연방 하원의원이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나름대로 치밀한 선거전략을 세웠다. 우선 선거운동 관리자를 채용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주 상ㆍ하원 의원이나 연방 하원의원쯤 되면 경험 많고 널리 알려진 전문 선거운동 관리자(campaign manager)를 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과거 몇 명의 후보를 당선시켰는지 기록을 꼼꼼히 살핀 뒤에 밥 구티(Bob Gouty)란 베테랑 선거 전문가를 채용했다. 체격이 작고 뚱뚱한 구티는 예리한 인상에 공격적인 선거전략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우리는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인 지역정치 베테랑 척 베이더를 가장 유력한 상대로 지목했고, 다음으로 변호사 짐 레이시를 꼽았다. 미 연방 상무부 소속 변호사로 언변이 좋기로 알려진 레이시는 연방 정부 제도에 정통한 만만치 않은 경쟁자였다. 그 밖에 4명이 더 후보로 나설 것으로 조사됐다.
첫 번째 여론조사 결과가 너무 실망스러웠다. 척 베이더가 70%의 지지로 단연 1위를 차지했고, 다음은 짐 레이시가 20%로 2위였는데, 나는 5%에 불과한 지지율로 3위에 머물렀다. 전혀 가망이 없어 보여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난한 나라에서 맨주먹으로 건너와 성공한 아메리칸 드림의 산 증인이 아닌가. 여론조사 정도에 쉽게 포기하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때마침 유권자 조사를 통해 많은 주민들이 직업 정치인과 변호사들에 환멸을 느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프로 정치꾼도 아니고, 언변으로 먹고 사는 변호사도 아닌 성실한 엔지니어로, 매일 발로 뛰어다니는 기업인 출신이니 이런 것을 선거전략의 핵심으로 삼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새삼 희망이 보였다.
나의 선거 공약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정부도 민간기업 같이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업은 적자로 부도가 나면 문을 닫는데, 정부는 적자가 나면 돈을 더 찍어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기업이 적자가 나면 물건 값을 올리는 대신 비용을 줄이는 것처럼, 정부도 적자가 나면 세금을 올릴 것이 아니라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둘째는 연방 하원의원이 너무 오래 워싱턴에 머물면 타성에 젖고, 게을러지기 마련이니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새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 그래서 3선 이상은 출마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임기 제한(term limit)’을 지역민에게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확정된 내 선거 메시지는 간단했다. “수 십년을 정치로만 소일한 낡은 정치인을 워싱턴으로 보낼 것이냐, 아니면 70% 이상이 변호사인 미 연방 의회에 또 한 명의 변호사를 보탤 것이냐. 그럴 생각이 아니라면 정치가도 변호사도 아닌 CEO 출신을 의회로 보내달라.”
한국에도 지난해 선거에서 CEO 출신의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미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CEO 출신 정치인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론조사에서 2위를 달리던 레이시는 나는 아예 안중에도 없이 오직 1등인 베이더 주 하원의원만을 집중 공략해 서로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나는 이런 두 사람의 다툼을 손뼉을 치며 지켜보면서 내 자신을 알리는 데 진력했다. 일종의 어부지리였다.
나는 정부도 개인이 사업을 하듯 운영했더라면 천문학적 규모의 적자는 없었을 것이란 주장을 펴면서, 인구 8만 다이아몬드 바 시장으로서 내 업적을 내세웠다. 인구 8만 도시면 공무원이 200여명은 될 터인데 우리 도시는 모든 서비스를 개인회사에 하청(outsourcing)해 시 직원이 고작 20명 남짓했고, 모든 서비스는 A급이었다.
특히 다른 도시들이 적자운영에 허덕일 때 우리 시는 남은 예산을 은행에 예금할 정도라는 사실을 알리면? 이것이 바로 정부를 개인기업 같이 운영한 결과임을 강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메시지의 효과는 대단했고, 유권자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지지도가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투표일 3주전 신문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는 내가 1위였고 이어 척 베이더, 짐 레이시의 순이었다. 두 사람은 허둥지둥 서로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나를 주 목표로 공략했지만 돌아서기 시작한 민심을 돌리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결국 나는 공화당 후보로 그 해 11월 둘째 주 화요일에 실시된 본선에 출마해 민주당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물리치고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전 세계 언론이 한국계 최초 미 연방 하원의원 당선을 대서특필하는 가운데 나는 미국 고교 역사교과서에서 현대사 부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영웅’이 됐다.
내가 잘 나서인가? 그 때는 그렇게도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 보면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운이 좋았었다. 모든 여건이 나를 유리하게 만들어 줬다. 열심히 도와준 많은 친구들과 자원 봉사자들, 그리고 교포의 힘이 컸다. 무엇보다 모든 게 다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지만 시의원과 시장을 거치면서 단 한 번의 실패없이 공직에 당선되니 혼자 잘난 척하는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다. 별안간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눈에 보이는 게 없기 마련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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