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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최초의 美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3> 4·29 흑인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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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최초의 美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 <3> 4·29 흑인 폭동

입력
2008.04.1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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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하원의원 진출을 결심하고 선거운동에 몰두하고 있을 때 발생한 이른바 `4.29 흑인 폭동’ 은 내게는 첫 번째로 닥친 정치력 시험대였다. 미 역사상 최악의 흑인 폭동으로 기록된 4.29 폭동은 한인 동포들이 밀집해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상가를 중심으로 벌어진데다, 내 자신이 바로 이웃 도시의 행정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한 대처는 분명 나의 선거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폭동은 한인 동포들에게 미국사회에 눈을 뜨게 하는 중요한 교훈을 가져다 준 참사였다고 생각된다. 사건이 발생한 1992년 4월29일. 나는 마침 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다이아몬드 시의 내 사무실에 앉아 다음 주로 예정된 골치 아픈 공청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운영하는 토목 설계회사 (Jay Kim Engineers, Inc.) 경리부에서 전화가 왔다. 회사 직원들의 급여가 은행계좌에 아직 입금이 안 됐으니 빨리 사무실로 와 달라는 급한 전화였다.어째 골치 아픈 일들만 자꾸 일어나나 투정하며 서둘러 회사로 가기 위해 일어나 보니, 무언가에 화가 잔뜩 난 시민들이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뒷문이 없으니 피할 수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만나보기로 했다. 시장실 문 밖에는 생각보다 많은 주민들이 몰려와 있었다. 이들은 “도대체 시장이 뭘 하는 거냐. 어째서 우리 동네는 길 청소를 하지 않느냐. 길이 얼마나 더러운지 지금 같이 가서 보자”는 등 막무가내로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렇게 복도에서 한동안 왈가왈부 싱갱이를 하는데 갑자기 비서가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경찰서장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고 알린다. 로스앤젤레스 중심가 다운타운에서 폭동이 났다는 전갈이었다. 아직도 길 청소 문제를 놓고 웅성대는 주민들 사이를 빠져나가 파악한 내용은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니 LA에서 불과 20마일 (32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 시에서도 서둘러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속으로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구나” 하며 달력을 보니 4월29일이다. 불현듯 어려서 서울에서 본 4.19 학생의거 생각이 났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정권 타파를 외치며 뛰어다니던 자랑스런 대학생들의 모습과,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인 이기붕씨의 서대문 집에 들어가 가구들을 모두 끌어내 불을 지르고, 이기붕씨의 아들이자 이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이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총으로 쏘아 죽이고 자살했던 끔찍한 일들이 머리 속에 급히 떠올랐다. 물론 4.29 흑인폭동은 우리의 4.19 민주학생 의거와는 전혀 다른 일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시 경찰력 만으로는 폭동 진압이 어려울 것에 대비해 주변 도시들에 도움을 요청하고 우리 시의 경찰력도 비상대기 상태에 있도록 지시했다. 그리고는 경찰차를 타고 부지런히 사건이 터진 로스앤젤레스로 달렸다. 제일 먼저 올림픽가의 한인타운에 도착하니 대한민국 해병대라고 쓴 머리띠를 두르고 해병대 군복에 공기총을 든 한인 젊은이들이 달려와 나를 에워싸고 환영했다. 이들은 한인타운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해병대 출신 동포들이었다. 가슴이 뭉클하고 자랑스러웠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상가는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퍼져 있어 마치 남쪽에 사는 흑인들이 북쪽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백인들을 향해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 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러다 보니 흑인들이 대거 백인 지역으로 쏟아져 나온 이 폭동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이 한인 상가들이었다.

한인 상가는 식당, 가발 가게, 세탁소, 주유소, 가구점 등으로 남미 계통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는 업소들이 주종이었다. 한인 타운은 한인들과 남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며 백인과 흑인 동네 중간에 샌드위치 같이 끼여 있었다. 흑인들이 남쪽에서 북쪽의 백인 지역으로 올라오려면 자연히 한인 타운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흑인이 아니라 남미 사람들이 한인 상가를 부수고 맥주, 의류, 텔레비전 등을 약탈해 가는 모습이 뉴스에 잡혔다.

한인 상가는 난장판이 됐고 사방이 불바다였다. 해병대 복장을 한 한인 타운 지키기 결사대들이 건물 지붕 위에 올라가 공기총을 쏘면서 한인 상점들을 보호하는 장면도 텔레비전에 중계됐다. 마치 6.25 때 시가전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것이 미국이란 말인가. 많은 미국인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자기들 삶의 터전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나선 용감한 한인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나는 이들 덕에 덩달아 영웅으로 취급 받게 됐고, 내 선거운동은 이 사건으로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 한인 동포들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와 피해를 안겨준 미 역사상 최악의 흑인 폭동이 내게는 뜻밖에도 연방 정치무대 진출을 도와준 효자가 된 셈이다. 나는 억세게 재수가 좋은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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