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채(淡彩)의 수묵화다. 여름 바람이 숲을 어루만져 녹색이 결을 드러내고, 숲보다 짙은 차밭의 녹색 속으로 상여 행렬이 느릿느릿 흐른다. 바람소리에 묻힌 단조(短調)의 만가(輓歌)는 구슬픔을 잃고 평화롭다. 박모(薄暮)에 푸르름을 뺏긴 숲에 가느다란 피아노 선율이 입혀진다.
담백하다 못해 투명한 <너를 보내는 숲(殯の森)> 의 프롤로그다. 가와세 나오미(河瀨直美) 감독은 이 투명한 묵향 속에 떠나고 떠나보내는 인간의 생을 그려 넣는다. 창호지에 퍼지는 먹의 템포로,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생의 풍경이 번진다. 너를>
나라현의 한 노인 요양원. 스태프로 일하는 마치코의 눈에 치매를 앓는 노인 시게키가 들어온다. 서서히 소멸해가는 노인들의 삶 속에서, 그는 집요하게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한 모임에서 시게키는 승려에게 묻는다. “나는 살아 있습니까?” 승려는 마치코에게 시게키의 손을 잡아줄 것을 부탁한다. “따뜻한가요? 마치코씨의 에너지가 당신에게 전해졌나요? 그렇다면 그게 살아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시게키는 마치코의 온기를 느끼지 못한다.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 33년째 영혼을 유폐해 온 그는 고사목처럼 뻣뻣하다. 자신을 돌봐주는 마치코를 밀쳐 오히려 상처를 입힌다. 그런 시게키에 마치코는 되레 동질감을 느낀다. 영화는 함축적인 터치로, 마치코의 내면에 똬리를 튼 상실감을 보여준다. 그 상실감은 유세이라는 이름의 죽은 아들이다.
마치코는 시게키와 함께 소풍을 떠난다. 하지만 좁은 농로에서 차는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시게키는 인가를 뒤로 한 채 숲으로 들어간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에요?” 장난인 줄 알고 시게키를 따라가던 마치코가 절규하듯 소리친다. “마코(죽은 아내)한테.” 마른 대답을 남긴 채 허황한 발길을 내딛는 그를 마치코는 뒤따를 수밖에 없다.
폭우는 두 사람을 숲 속에 감금하고, 시게키는 젖은 고양이처럼 추위를 이기지 못한다. 마치코는 자신의 벗은 몸으로 시게키의 젖은 몸을 비벼 말린다. “우리, 살아 있죠?” 영화 초반 시게키가 했던 말이 대구를 이루며 마치코의 입에서 되풀이 된다. “살아 있어. 살아있고 말고.” 다음날 아침, 시게키는 33년 동안 쓴 일기를 땅에 묻는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감독은 생의 진중한 의미보다 그것을 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생의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의 인연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모습은 철학이 아니라 문학의 풍경이다. ‘상실감’을 고리로 서로를 치유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목도하다 보면, 가슴 속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샘솟는 걸 느끼게 된다.
가장 큰 매력은 압도적인 영상미. 녹색이 채도를 잃어가는 박모의 시간, 부숴져 쏟아지는 숲속의 햇살이 손으로 들고 찍은 카메라 속에 속절없이 빨려 들어갔다.
빛으로 감정을 압축해 내는 절제미가 17음절만으로 구성된 일본시 하이쿠(俳句)를 연상케 한다. 논픽션과 픽션을 혼재한 듯한 독특한 연출, 인위적 음악 대신 자연의 소리를 사용하는 감독의 스타일도 살아 있다. 지난해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그랑프리) 수상작. 24일 개봉. 전체관람가.
■ '日 영화계 신데렐라' 가와세 나오미 감독 특별전
<너를 보내는 숲> 의 개봉과 함께 17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나다에서 가와세 나오미(39) 감독의 특별전이 열린다. 너를>
가와세 감독은 19살 때 <수자쿠> 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시네 아티스트. 일찍 부모를 잃고 자란 환경 탓에 그의 영화 속에는 가족의 테마와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이 반복해 드러난다. 수자쿠>
지극히 섬세한 카메라워크와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가미된 담백한 연출이 특징이다. <수자쿠> <사라소주> <호타루> <따뜻한 포옹> 등 10개 작품이 상영된다. 서울 특별전이 끝난 뒤에는 대전 광주 대구 등에서도 순회 상영이 이어진다. 따뜻한> 호타루> 사라소주> 수자쿠>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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