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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위법한 판결,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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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위법한 판결, 그 이후

입력
2008.04.14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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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6일 법원이 정몽구 현대ㆍ기아차 그룹 회장에게 집행유예와 함께 준법경영을 주제로 한 강의ㆍ기고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했을 때, ‘참 희한한 판결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 회장이 강의와 기고를 위해 실제 ‘땀’을 흘렸는지, 아랫사람들을 부린 것은 아닌지 검증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조차 제시하지 않은 판결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러면서 ‘과연 법원이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판결을 내렸을까’하는 생각에 은근히 부아가 났다. 그것이 수백억원의 회삿돈을 횡령한 재벌 회장에게 수천억원의 돈을 내는 조건으로 집행유예와 함께 전례없는 사회봉사명령을 내린 법원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반응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한국일보가 ‘경제현실 앞에 저버린 재벌 엄단 약속’이라고 비판하고, ‘강의ㆍ기고 사회봉사명령은 대법원 예규에도 없는 것’이라고 문제점을 지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법관이 고뇌 끝에 내린 법률적 판단에 대해 비 법률 전문가인 기자가 ‘국민 법 감정’만 앞세운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의 빚처럼 남아 있던 법원과 법관에 대한 미안함은 지난 주 사라지고 말았다. 대법원이 하급심 재판부의 강의ㆍ기고 사회봉사명령이 위법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더 큰 의문과 의심이 싹텄다. 법 규정에 충실해야 할 법관이 어떻게 법에 어긋나는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법관은 “법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했으며, 비판은 달게 받겠다”고 했지만 법관의 인간적 고뇌가 위법한 판결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일까, 무슨 이유와 배경에서 규정에도 없는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했을까….

굳이 지난 판결을 끄집어 낸 것은 가진 자, 힘있는 자들과 관련된 재판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이들에 대한 법원의 지나친 습관적 관대함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법원은 지금껏 기회 있을 때마다 공평무사한 법 적용 의지를 강조해왔고, 그런 노력을 계속해온 게 사실이다.

양형의 기준을 만들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관들이 그 기준을 따르도록 한 것이나 선거 때마다 과감하게 당선무효형을 선고토록 한 것, 2심에서 1심 형량을 깍아주는 온정주의적 판결을 지양토록 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그런 지침은 대법원의 권고 정도일뿐, 법관 개개인에 구속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선거법을 위반하고도 당선된 자에게 당선무효형인 벌금 100만원에 약간 못미치는 벌금 80만~90만원을 선고해 정치 생명을 유지케 해주거나, 재벌 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검증된 적조차 없는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이유로 대는 것은 법원으로서도 군색한 일이다. 법 조항에 가장 충실해야 할 법관들이 자꾸 법외적인 상황론에 기대는 것은 법 운용의 안정성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보통사람들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할 법 앞에서 정치ㆍ경제 권력자와 차별받는데 분개한다. 우리 사회의 마지막 양심으로 여기던 법원마저 일부 편향된 모습을 보일 때, 보통사람들은 자괴감에 빠진다. 그 결과는 법원에 대한 신뢰 저하, 재판 결과에 대한 불승복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18대 총선이 끝나 선거법 위반 당선자들에 대한 수사가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 특별검사팀도 수사를 마치고 곧 관련자들을 기소할 것이라는 소식이다. 법원이 다시 한번 서게 될 그 시험대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지,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는 걸 보면 기자도 영락없는 보통사람인 것 같다.

황상진 사회부장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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