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근무하다 보면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오시는 분들도 다양하지만 만남의 형태도 제각각 다르다. 대부분은 공동 개최되는 문화행사의 조력자로, 조사ㆍ연구프로젝트의 협력자로, 언론사의 출입기자로, 문화기관의 대표로 나를 찾아오시는 분들이다. 그 중에는 관람객으로 박물관을 찾았다가 무작정 관장실까지 들어오는 분들도 간혹 있다. 그들과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치관이나 지향점이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느낌은 같은 기관이나 모임에 속한 사람들을 동시에 만나게 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춘천시 의원들을 박물관에 초청한 일이 있었다. 박물관이 춘천시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시민을 대표하는 의원들에게 예우도 해 드리고 박물관도 소개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들과 어울려 한참 동안 전시실을 둘러보고 연잎차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의원으로서의 공통점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성과 연령, 전직, 성격, 관심분야 등에서 서로 너무나 달랐고, 나와도 많이 달랐다.
나와도 많이 다르고 그들끼리도 많이 다른 사람들이지만, 그들과 일정한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세상 사는 이치를 다시금 깨우치게 된다. 제일 먼저 ‘같은 하늘 아래에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같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인간세상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익히 배워온 바이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자각하게 해준다.
그 다음으로는 ‘서로 너무 다르기 때문에 장벽처럼 단단하게 쌓아 올린 지금의 내 모습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전혀 소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경우만 예로 들어 보아도 오랫동안 읽어온 책과 쌓인 경험이 그들과 다르고, 또한 그것들을 토대로 키워온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현재의 내 생각, 내 방식, 내 판단’을 버리지 않고서는 서로 깊이 다가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이치가 새삼스러울 것은 전혀 없다. 중ㆍ고등학교 졸업식장에 가면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한가운데 으레 들어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남을 인정해라’, ‘타인은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다’, ‘자신을 버려라’와 같은 평범한 말씀이 역시 진리였음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된다.
이렇게 박물관에는 ‘박물(博物)’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박인(博人)’이 있다. 너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관조(觀照)의 사유가 있다. 그리고 박물관은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고, 내면과도 소통하여 ‘현재의 나’가 아닌 ‘참다운 나’를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세상 살아가는 도리를 다시 한 번 깨우치게 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박인’의 공간, 박물관에서 나무처럼 뿌리를 묻고, 사람들을 기다릴 것이다. 또한 그들이 작은 생각을 나누고, 경험도 나누고, 문화 담론(談論)도 서로 나누도록 노력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통해서 세상을 배워나가듯이 그들끼리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다. 예컨대 박물관으로 초청하고 소통의 프로그램도 준비하며 박물관의 공간도 다양하게 꾸미면서 ‘참된 소통’과 ‘인생 배우기’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박물’의 공간을 ‘박인’의 공간으로 바꾸는 데 디딤돌을 놓을 것이다.
유병하 국립춘천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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