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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화가 이상남 11년 만의 귀국전 '풍경의 알고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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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화가 이상남 11년 만의 귀국전 '풍경의 알고리듬'

입력
2008.04.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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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위로 면도날 같은 긴장이 흐른다. 원의 팽만과 직선의 예민성, 회전하는 타원의 속도감. 흡사 건축도면처럼 질서정연하게 압축되고 정제된 기하학적 기호들은 그러나 바라보면 따스하고 경쾌하다. 때론 사색적이고 우아하기도 하다.

재미 추상화가 이상남(55)의 개인전 '풍경의 알고리듬'(연산법)이 서울 청담동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서 10일 시작됐다.

1997년 한국에서의 개인전 이후 만든 70여점의 작품으로 11년 만에 여는 귀국전이자, PKM갤러리가 180여평 규모로 청담동 트리니티플레이스 빌딩에 오픈한 새 전시장의 개관전.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한국출신의 뉴욕 작가가 고국에 제출하는 두 번째 보고서"라고 말했다.

이상남의 주제들은 자연이 아닌 인공과 문명에서 나온다. "인공적 기억에 대한 질문들이죠. 추잉 이미지(chewing image), 끊임없이 복제되고 소비되고 재생산되는 현대사회의 이미지를 껌처럼 씹는 겁니다.

내 그림에선 삶을 상징하는 원과 죽음을 뜻하는 직선이 끊임없이 붙었다 떨어졌다 엮여요. 난 엉키는 그 1%의 세계가 아주 흥미로워요. 원과 선, 그 어느 것도 절대적 위계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내 그림은 민주적이죠."

작가는 캔버스나 패널에 아크릴 물감을 칠한 후 사포로 갈아내기를 수십 번 반복해 화면을 반들반들하게 만든다. 실끝만큼도 틀림없는 채색과 요철 없는 화면은 기계적 정확성을 보여주지만, 기실 작가의 수공업을 통해 이룩된 것. 그리되 그리지 않은 것 같은 그림, 기계적이고 기하학적인 그림이지만, 그리고 칠하고 갈아내는 노동집약적 행위를 통해 얻어진 것들이다.

상감기법을 빈 결 고운 화면에선 잔잔히 색이 우러나오고, 서양화의 재료로는 드물게 옻을 사용한 덕에 검정색은 깊고 환하게 반짝거린다.

잘 나가던 청년작가 이상남은 1981년 청운의 꿈을 안고 뉴욕에 도착했다. 사진과 설치작업을 통해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을 구현해온 그이지만, 뉴욕에서 맞닥뜨린 건 정반대의 사조인 독일표현주의가 유행하고 있는 미술계. 낭패였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던 게 그로 인해 폐기했던 캔버스와 물감을 다시 잡게 됐어요. 페인팅을 안 하던 사람이 페인팅 실험을 시작하면서 회화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죠."

27년에 걸친 치열한 작업을 통해 그는 독특한 회화적 언어를 구축한 작가로 뉴욕타임스와 <아트 인 어메리카> 같은 세계적 미술평론지의 지면을 확보하는 일에 성공했다. "내 회화의 무기는 스트롱한 언어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라고 그는 말한다.

구상을 회화적으로 환원한 그의 기계적 상징과 기호들 앞에서 낙심하기 쉽지만, 구체성이 결락된 각각의 기호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묻지 말라. 번역이 불가능한, 아니 불필요한 그의 기호들은 그저 풍경처럼 감상하면 그걸로 족하다.

누군가는 세로로 무한히 확대되는 나누기 부호를 보고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연상할 수도 있고, 다른 이는 서서히 소실되는 층층계단을 떠올릴 수도 있다.

원과 선의 연속과 단절을 보면서 누구는 우주의 악보를 환기하고, 어떤 이는 율동하는 신체의 아이콘을 읽는다. 모두, 수학적으로 환산된 풍경의 도해일 뿐이다.

말과 몸짓에서도 열정적인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일러 "뉴욕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뉴욕작가다.

"어마어마한 이미지가 쏟아지는 곳, 그야말로 뉴욕의 힘 덕분이죠. 그동안의 작업을 통해 뉴욕 미술계에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왔다면, 이번 전시는 뉴욕 미술계에 더 깊숙이 들어가는 계기가 될 겁니다." 이번 서울 전시에는 <아트 인 어메리카> 등 미국의 3개 미술평론지가 취재를 나온다.

그는 "치열한 아이디어의 경연장인 뉴욕에선 어떻게 강력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가가 관건"이라며 "이번 전시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모르겠다"고 웃었다. 미소는 기대감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5월20일까지. (02)515-9496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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