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지민(34)씨가 첫 소설집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문학동네 발행)를 펴냈다. 이씨는 2000년 '이지형'이란 필명으로 쓴 장편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2004년 장편 <좌절금지> 를 발표했다. 1930년대 경성을 무대로 한 독특한 연애소설인 등단작은 올 하반기 개봉 예정 영화 <모던보이> 의 원작이기도 하다. 모던보이> 좌절금지> 망하거나> 그>
등단 8년만의 단편집이지만 9편의 수록작을 통해 작가의 문학적 궤적을 그려보는 일은 대체로 무의미하다. 작가가 단편을 쓰지 않고 보냈던 시간이 적지 않을 뿐더러, 수록작 선정 기준도 여타 단편집과 달리 '주제'에 뒀기 때문이다.
이씨는 기발표작 중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5편만을 추렸고, 이에 부합하는 4편의 신작-'대천사' '키티 부인' '영혼 세일즈' '타파웨어에 대한 명상'-을 따로 썼다. 덕분에 여러모로 가지런한, '신작'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작품집이 탄생했다.
영화배우와 생활인의 역할을 구분 못하는 꽃미남 배우의 혼돈을 다룬 '영혼 세일즈'를 빼면, 수록작 전부가 '위기의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도시 중산층 수준의 격을 유지하려 애쓰는 이들의 현실엔 다양한 양태의 위기가 찾아든다.
그것은 다른 여자를 맘에 두고 있다는 남자의 고백을 듣고도 차마 거두지 못하는 미련(표제작)이기도 하고, 바람둥이 성형의와의 불륜마저 감행케 하는 중증의 성형 중독('대천사'), 바람피우다 못해 아예 콘돔을 낀 채 만취 귀가한 남편('불륜 세일즈')이기도 하다.
"요즘 칙릿 소설은 사실 판타지죠. 제 처지에 만족하며 행복을 느끼는 20, 30대 여성들은 많지 않거든요. 아름다워야 한다, 낭만적 연애를 해야 한다, 행복한 가정을 꾸려야 한다, 그런 기준에 끌려가다보니 불행이 생기는 것 아닐까요."
작가의 말대로 작중 여성들의 위기는 현실적인 만큼이나 심리적이다. '키티 부인' 속 아내는 "서울 강남의 중산층이란 우량 품종끼리 무리 없이 교배"된 가정을 꾸리고도 행복 대신 불안에 매몰된다.
만삭에 가출해버린 그녀가 꾸며둔, '헬로키티' 캐릭터들로 장식된 아기방에서 남편은 "더이상 자신이 사랑받는 분홍색 키티가 아닌 현실은 아픔이었던 것"이라고 아내의 고통을 짐작한다.
퇴직금 털어 카페 '이녹'을 차리며 서른여섯 노처녀 '인옥'은 "크림색 조명이 예쁜 카페"의 "미소가 아름다운 여주인"을 꿈꿨건만, 그녀의 평온과 가게의 호황은 허름한 자기 처지를 인정한 후에야 찾아온다('오늘의 커피').
하여 관건은 현실보다 먼저 눕고 일어서는 마음을 어떻게 추스를 것인가다. 표제작은 은근하고도 유쾌한 답변이다. 남자의 본심을 알고도 '나'는 고통스러운 실연 대신 그 곁을 맴돌길 자청한다. 새 연인과 삐걱대면서 교통사고로 팔까지 다친 남자를 집에 바래다 주는 일이 그것. 좀 추레하지만 그에게 이런 말까지 끌어내니 나름 성공이다.
"그 동안 선숙씨한테 중독됐나봐요. 집에 혼자 오는데 허전하더라고요. 가끔 이렇게 같이 걸을 수 있죠? 우리 아직 친구 맞죠?" 마지막 작별 인사 후 깨끗이 돌아서는 것으로 '나'의 현명한 감정 연착륙은 완성된다. 그 등 뒤, 짙은 페이소스까지야 어쩔 수 없겠지만.
이씨의 단편은 시원시원하다. 플롯을 간결히 하면서 선명하고 동적인 스토리라인을 펼친다. 기발한 직유가 빛나는, 유머러스한 문장도 맛깔스럽다.
이씨는 "장편 쓸 때가 물리적으로 더 힘들다는 점만 다를 뿐, 단편이든 장편이든 캐릭터와 사건의 재료가 다 갖춰진 다음에야 쓸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못 느낀다"고 말했다.
압축하기보단 풀어내는 이씨 소설 스타일의 연유를, 시나리오 작가-<품행제로> (2002)가 그의 작품-로도 활약 중인 그의 이력에서 찾는 시각이 많다. 이씨는 "영상 화법을 일부러 의식하는 것은 아니고, 아이러니한 인물ㆍ상황을 유머 있게 풀어쓰는 게 취향에 맞다"고 말했다. 품행제로>
덧붙여 "문장을 능숙하게 쓰는 것보다, 인생에서 특별한 걸 발견할 수 있는 탐험가로서의 내공이 작가에게 더 소중한 미덕"이라고 말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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