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아홉 번째 임금 성종의 계비(繼妃)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윤씨(尹氏)의 손톱은 한국 정치사를 뒤흔든 손톱이었다. 그녀는 지아비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퀸 일로 시어머니 인수대비의 노여움을 사 궁정에서 쫓겨났고, 마침내 사약을 받고 죽었다.
폐비 윤씨 사사(賜死)사건은 뒷날 조정을 피로 물들인 갑자사화의 빌미가 되었다. 복수심을 가눌 길 없었던 연산은 제 어미의 폐출과 사사에 연루된 신하들과 그 피붙이, 문인(門人)들을 남김없이 죽였다. 이미 죽은 이들은 그 관을 쪼개어 시신의 목을 베었다. 낭자한 유혈 속에서 광기와 공포와 배덕이 파들거렸다.
정치사적으로 갑자사화는 궁중세력(宮中勢力)에 의한 부중세력(府中勢力)의 숙청이었고, 이 비극의 연출자는 주군의 심리적 급소가 어딘지 알아차린 임사홍이었다.
그러나 그 주연배우는 연산이었고, 대본의 첫 줄은 그 어미 윤씨의 손톱으로 씌어졌다. 그녀의 손톱은 지아비의 얼굴만이 아니라 자식의 마음을 할퀴었고, 그 아들의 상처난 마음을 통해 16세기 초 조선 역사를 할퀴었다.
성종의 얼굴을 할퀸 손톱은 느닷없는 미움의 손톱이었겠으나, 실상 사랑의 손톱이기도 했다. 시샘은 사랑의 가장 격렬한 에너지이기 일쑤이니 말이다.
지아비의 눈길이 엄씨(嚴氏) 정씨(鄭氏) 성을 지닌 숙의(淑儀)들에게 쏠리고 시어머니까지 이들을 싸고돌며 그녀를 따돌렸을 때, 중전 윤씨에게 남아있는 무기는 손톱밖에 없었다. 그 손톱은 지아비를 향한 정애(情愛)의 엇나간 무기이면서, 경쟁자와 훼방꾼에게 휘두른 증오의 무기였다.
여성적 폭력과 공격성의 기호
손톱은, 특히 뾰족한 손톱은, 여성적 폭력과 공격성의 기호다. 남자가 손톱을 들이대며 싸우는 일은 거의 없다. 유치원이나 놀이방에서조차, 사내아이들은 손톱으로 할퀴는 걸 꺼린다.
손톱을 무기로 쓰는 순간, 십상팔구 '계집애 같다'는 놀림을 받게 될 테니. 그러나 할큄을 여성과 잇는 상상력의 바탕은 생물학적이라기보다 문화적인 것 같다.
사실 할큄은 손톱(네발짐승의 경우엔 앞발톱)의 핵심 기능이다. 적지 않은 자연언어가 그 사실을 승인한다. 예컨대 이탈리아어에서 '할퀸 상처'라는 뜻의 웅기아타(unghiata)는 손톱을 뜻하는 웅기아(unghia)에서 나왔다.
'발톱을 숨긴다'거나 '발톱을 드러낸다'는 한국어 표현에서도, 발톱은 할큄으로 구체화하는 공격성의 기호다. 여기서 발톱은 네발짐승을 상정한 것이므로, 사람으로 치면 손톱에 해당할 테다. 그리고 고양이과 네발짐승들은 암놈만이 아니라 수놈도, 적을 할퀴는 데 앞발톱을, 곧 손톱을 기꺼이 쓴다.
사람을 제외한 영장목 포유류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러니까 손톱은 질투를 매개로 한 사랑의 무기이면서(부드러운 할큄이라 할 긁어주기는 게다가 사랑의 직접적 표현이다), 암수자웅 구별 없는 공격의 무기다. 물론 너무 강한 상대에겐 '손톱도 안 들어가'겠지만
인체에선 드문 광물성 이미지
손톱은, 발톱과 함께, 사람 살갗에서 가장 별난 부분이다. 살갗은 얼마쯤 물렁하게 마련이지만, 손톱과 발톱은 딱딱한 각질이다. 그것들은, 이(齒牙)와 함께, 사람의 외관에서 드물게 광물성 이미지를 지닌 기관이다. 손톱과 발톱을 통해, 사람과 게와 딱정벌레 사이의 먼 거리가 문득 좁혀진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먼 거리도 그렇다.
손톱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지구생물계의 일원임을, 더 나아가 무생물 자연계와도 깊이 이어져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 몸이 바닷가의 조가비나 조약돌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손톱은 본디 손가락 끝을 보호하기 위해 생겼겠으나, 사람들은 이내 그것에서 장식적 효용을 발견했다. 손톱에 꽃물을 들이거나 매니큐어를 칠할 때, 거기 온갖 형상을 아로새기며 네일아트를 실천할 때, 우리는 손톱을 성적 소구에 이용하는 것이다.
할퀴는 손톱은 동물적 공격성의 기호지만, 보여주는 손톱은 사랑의 미끼다. 누군가의 손이 섬섬옥수라 할 만큼 곱다면, 손톱은 그 섬섬옥수의 우듬지다.
손톱은 제 단단함으로 손가락 끝을 보호함으로써, 얄궂게도 그 밑살을 우리 몸의 가장 여린 부분으로 만들었다. 마음에 꺼림칙하게 걸리는 일을 비유하는 '손톱 밑의 가시'라는 관용어가 손톱밑살의 그 예민함을 드러낸다.
생인손(생손)이나 생인발은 또 얼마나 욱신거리는가. '손톱 밑의 가시가 생손으로 곪는다'는 속담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로 큰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손톱 밑의 가시만 해도 이미 충분히 고통스러운 화다. 그래서 손톱 밑에는 고문기술자들의 악의가 흔히 쏠린다.
장식적 효용… 사랑의 미끼로
손톱밑살만큼은 아닐지라도, 손톱뿌리나 손톱눈 역시 예민하긴 마찬가지다. 손톱뿌리 둘레의 거스러미로 신경을 곤두세워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손톱은 신체의 가장 단단?부분이면서 가장 여린 부분이다. 그것은 사랑을 닮았다. 손톱처럼 사랑도, 굳세면서 잔약하다.
할퀴거나 긁어낼 때, 치장의 대상이 될 때, 손톱은 사랑과 미움과 노동의 기호다. 그러나 그것을 깨물 때, 손톱은 채우지 못한 욕구의 기호다. 사람은 불안할 때 제 손톱을 깨문다. 걱정거리가 생겨 안달하는 것을 뜻하는 '손톱여물을 썬다'는 관용어도 그래서 나왔다.
서양사람들도 조바심이 날 때 그런 행태를 보이는 모양이다. 이를테면 영어에는, 욕구불만이나 초조한 심리상태를 비유하는 네일바이팅(nail-biting)이라는 말이 있다. 그 때, 손톱은 좌절한 사랑의 기호일 수도 있을 테다.
손톱과 발톱은, 머리카락과 함께, 자라는 것을 쉬이 깨달을 수 있는, 매우 드문 신체부위다. 그러니까 손톱은 가장 광물적이면서도 가장 식물적이다. 쑥쑥 자라나는 걸 실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손톱은 생명과 생장의 기호다.
모든 생명과 생장의 원동력인 사랑의 기호다. '손톱은 슬플 때마다 돋고 발톱은 기쁠 때마다 돋는다'는 말은 세상살이에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다는 뜻일 테다. 손톱이 발톱보다 과연 더 빨리 자라는지는 모르겠으나, 손톱을 발톱보다 자주 깎게 되는 걸 보면 과연 그런 것도 같다.
예전, 통기타가 젊음을 상징하던 시절엔 적잖은 젊은이들이 기타 현을 퉁기기 위해 손톱을 길렀다. 기타 연주 솜씨는 흔히 로맨스를 설계하는 밑천이기도 했으므로, 기다란 손톱은 그 시절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기호 노릇을 한 셈이다.
이탈리아사람들은 긴 손톱을 도둑질과 연결시킨다. '긴 손톱을 지녔다'(avere le unghie lunghe)는 것은 도벽이 있다는 뜻이다. 길게 기른 손톱은 누군가를 유혹하면서 뭔가를 훔쳐낸다.
스페인사람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손톱 자체를 도둑질과 연결시킨다. 스페인어 화자가 '손톱으로 산다'(vivir de la una)고 말할 때, 그것은 생업이 도둑질이라는 뜻이다.
실상, 노동하는 손톱의 일차 기능인 긁어내기를 훔치기에 포갠 스페인사람들의 상상력에는 뭔가 그럴 듯한 데가 있다. 그 둘에다 사랑을 다시 덧댈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긁어내는 것, 훔치는 것이니까.
손톱은 작은 것의 비유다. 손톱만큼도 모른다고 할 때의 그 손톱. 그러나 그 작은 손톱 속에는 더 작은 손톱이 또 있다. 속손톱 또는 반달이라 부르는 것이다. 한자어로는 조반월(爪半月)이라고 한다. 속손톱을 반달이라 부르는 관행은 서양에서 빌려온 듯하다.
영어 화자들은 속손톱을 반달(half-moon)이라 부르고, 프랑스어 화자들은 작은 달(lunule)이라 부른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처녀성의 상징이므로, 사랑의 기호 손톱은 제 가장 안쪽에 순결을 품고 있는 셈이다.
윤기·색깔로 '건강의 창' 기능도
손톱을 더러 '건강의 창'이라 이르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손톱은 건강을 재는 지표다. 일반상식에 따르면, 윤기있고 단단한 손톱, 골고루 분홍빛을 띤 손톱은 그 임자가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신호다. 그러나 이런 실용적 의학지표 너머에서, 손톱은 사랑의 기호다.
창백한 손톱이든 발그레한 손톱이든, 바짝 자른 손톱이든 길게 기른 손톱이든, 갸름한 손톱이든 넙적한 손톱이든, 맑은 손톱이든 탁한 손톱이든, 맨 손톱이든 치장한 손톱이든, 손톱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페티시가 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손톱들은 사랑의 주체도 될 수 있다. 긁고 간질임으로써.
손톱의 중세어 형태는 손돕이다. 발톱의 중세어 형태가 발돕이듯. '손돕'의 '돕'은, 필시, '돋다'의 어근이 마지막 자음을 바꿔 명사화한 것일 테다. '집'이 '짓다'의 어근에서 나왔듯. 그렇다면 손톱과 발톱은 손에서 돋은 것, 발에서 돋은 것이라는 뜻이겠지. 아닌가?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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