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 오늘 점심 밥 값도 못 벌었는데, 무슨…”
12일 오후 4시 서울 을지로에 있는 방산시장. 이곳에서 문구나 액세서리용 비닐을 판매하는 성창비닐 포장자재총판의 유호원 총무는 “요즘 장사가 어떤지”를 묻자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 같이 답했다. 이제 곧 하루 해가 저물 무렵이지만 그 시간까지 개시조차 못했던 것이다.
“우리 뿐 아닙니다. 주변 가게 앞에 서 있는 저 용달차와 오토바이들을 보세요. 한참 배달을 해야 할 시간에 일감이 없어서 펀펀히 놀고 있잖아요. ‘누가 먼저 문을 닫고 들어가나’ 서로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유 총무의 씁쓸한 설명이 이어졌다.
각종 생필품에 사용되는 필름은 물론 포장지에서부터 벽지, 바닥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을 거래하는 방산시장은 3,000여개의 영세 업체들이 모여 있는 국내 대표적인 석유화학 제품 도ㆍ소매 장터다.
석유화학 제품 도ㆍ소매 시장인 이곳은 요즘 가파르게 치솟고 있는 유가와 원자재 가격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특히 내수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소비심리는 더욱 위축되고 있어 영세 중소 업체들의 체감경기는 크게 얼어붙고 있는 실정이다.
30년 넘게 방산시장에서 인테리어 필름을 팔아왔다는 이현승 삼성 비니루 사장은 “노는 날이 더 많은 게 현실이고 (방산시장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며 “팔아서 가게 임대료도 못 내는 판에 누가 남아서 장사를 하겠느냐”고 푸념했다. 3평도 안 되는 곳에 점포를 마련한 이 사장이 매월 내는 임대료는 월370만원. 방산시장의 가게 임대료는 적게는 200만원에서 많게는 800만원에 달한다.
“최근에는 인터넷이 활성화되는 바람에 손님들이 제품 가격을 먼저 알고 찾아 옵니다. 인터넷에서야 유통비용이 빠졌으니 저렴할 수 밖에요. 하도 장사가 안되니까 이곳에서도 동종 업체들끼리 가격을 후려쳐서 판매하는 제살깎기 경쟁까지 벌어지고 있으니 그저 답답할 노릇입니다.” 이 사장은 방산시장의 최근 동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비슷한 시각, 철제공구 점포들이 밀집해 있는 서울 영등포 철제상가로 이동해 시장상황을 둘러봤지만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신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립과 절단, 가공을 하는 작업장은 대부분 텅 비어 있다. 지금은 경기도 시화공단 등으로 많이 이주해 갔지만 구로와 신도림에 걸쳐 영등포까지 이어지는 영등포 지역의 철제공구상가에는 아직도 1,000여개 중소 업체가 모여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자동차와 전자재, 가전기기 등에 사용되는 열연제품을 철강업체로부터 넘겨 받아 이를 재가공 판매해 온 쌍용철강 전성백 과장은 “보통 1년에 한 두 번 오르던 철강제품 가격이 올해는 벌써 원자재 가격 상승 여파로 상반기에만 두 번이나 올랐다”며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경영자금을 조달하느라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끌어다 쓴 업체들은 도산 직전에 몰려 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중소제조업체 1,398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3월 중 주요 경영 애로사항’에 대한 설문 조사(복수응답)에 따르면 ‘원자재가격 상승’(73.5%)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고 내수부진(52.4%)과 인건비 상승(40.9%), 업체간 과당경쟁(40.6%)이 뒤를 이었다.
한 철제공구 가공업체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기업 프랜들리’라는 명분을 내걸면서 근사하게 여러 정책들을 발표하고 있지만 우리 같은 작은 영세 업체들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며 “대기업들 위주로만 진행되고 있는 정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다른 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허재경 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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