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예방을 명분으로 제작된 TV 영상물들이 범죄 수법을 적나라하게 묘사, 오히려 감수성 많은 10대들의 모방 범죄를 조장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이에 따라, 관련 영상물 제작이나 유통과정에서 청소년의 모방범죄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5팀장 유해철 경위는 양재동 일대에서 최근 잇따라 발생한 ‘퍽치기’ 용의자를 7일 검거한 뒤 깜짝 놀랐다. 대낮에 범행을 저지르고 미리 도주로를 확보하는 등 치밀한 수법으로 미뤄 20~30대 동종 전과자일 것으로 짐작했는데, 실제 범인은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에 따르면 용의자 이모(14ㆍ중2 중퇴)군은 지난달 6일과 17일 길가던 부녀자만을 상대로 둔기로 머리를 때려 실신시키는 ‘퍽치기’ 수법으로 수백 만원의 금품을 빼앗았다. 이군은 경찰 조사에서 잔인한 수법을 KBS의 ‘특명 공개수배’프로그램을 보고 배웠다고 진술했다.
케이블TV의 관련 프로그램도 10대 모방범죄를 조장하고 있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지난달 27일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와 짜고 ‘강도 자작극’을 벌여 금품을 훔친 혐의(특수절도)로 김모(17) 장모(17) 송모(17)군 등을 검거했다. 이들 10대는 케이블TV에 자주 방영되는 편의점 강도 영상물에서 힌트를 얻어, 송군이 편의점에서 혼자 일할 때 김군 등이 강도 연기를 하는 수법으로 100여만원의 금품을 털었다.
송군은 폐쇄회로(CC)TV에 자신이 강도를 당한 장면이 녹화돼 안심하고 있었으나, 위협을 당할 때 지나치게 차분한 모습을 보인 점을 이상하게 여긴 경찰의 추궁에 덜미가 잡혔다.
서울 송파경찰서도 지난달 30일 케이블TV 영화를 본 뒤 납치 자작극을 벌인 서모(15)군 등 가출 청소년 5명을 붙잡았다. 서군은 함께 가출한 이모(15)양의 휴대폰으로 이양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1,000만원을 내놓지 않으면 딸을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이양도 휴대폰 너머로 “아빠, 아빠”라고 비명을 질러 아버지를 속였다.
성폭력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방송 뉴스도 청소년 성범죄를 조장하고 있다. 부산에서는 혼자 귀가하던 여대생을 위협해 주차장으로 끌고 간 뒤 성폭행한 혐의로 중학생 김모(14)군이 검거됐다. 김군은 경찰 조사에서 “TV와 인터넷 동영상만 보다가 호기심이 생겨 그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공중파TV와 케이블TV, 인터넷 등을 통해 범죄 수법을 재연하는 각종 영상물을 엄격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박경래 한국형사정책연구소 박사는 “범죄 관련 프로그램이나 영화가 시청률이나 관객수를 높이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범죄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며 “자기 절제 능력이 잘 갖춰지지 않은 청소년들이 범행 수법을 모방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대혁 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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