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를 파는 직업. 박연범(33)씨는 자신의 직업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대한생명 보험설계사(FP)다. 흔히 볼 수 있는 보험설계사이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특별한데가 있다.
대학에서 정보통신공학을 전공하고, 미 하트포드(Hartford) 대학원에서 전자컴퓨터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후지제록스를 거쳐 국내 유수의 휴대폰 부품연구소에 재직했다. 2006년6월까지의 이야기다.
본인이 개발한 기술을 상사가 자기 이름으로 특허 등록하는 것을 보고 연구소를 박차고 나왔다는 그는 지금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다시 연구원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을 정도로 현재의 직업에 폭 빠져 있다. 보험설계사가 된 이후, 이전에 이력서를 넣어뒀던 모토로라 본사에서 채용하겠다는 연락이 왔지만, 갈 생각은 없었다.
‘살짝 고민해보다가’ 쉽게 모토로라의 제안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연봉(수당)을 알게 되면 수긍이 간다. 그는 한해 6억원 이상을 번다. 모토로라에서 제의한 연봉은 4만~5만달러(약 4,000만~5,000만원) 정도.
그는 보험설계사로 전향한 뒤 줄곧 ‘넘버 1’이다. 2006년 4분기 대한생명 루키(신인)대상을 받았고, 지난해 KLD챔피언(전사 1위)으로 뽑혔다. KLD는 대졸, 직장경력 2년 이상의 남성과 전문대졸, 직장경력 2년 이상의 여성 보험설계사만을 특화한 조직으로 기존 ‘아줌마부대’로 대표되는 설계사 조직보다 전문성을 강화한 일종의 ‘정예부대’다. 그가 소속된 곳은 대한생명 KLD 강남본부 강남지점. 공학을 전공한 점이 고객재무분석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는 오전 6시30분에서 6시50분 사이에 출근한다. 사무실로 가서 경제뉴스를 살피거나 금융상품공부를 하고, 팀별 회의를 한다. 9시에서 9시 30분 사이에 사무실을 나온다. 본격적인 하루 일과의 시작. 지하철로 이동하며 서울 강남 일대를 위주로 하루 4~5명의 고객을 만난다. 많을 때는 하루에 15~20명까지 만나본 적이 있다.
지인에게 소개 받은 한의사 한명을 중심으로 점차 인맥을 넓혀 지금은 강남지역 의사, 한의사, 음식점 경영자들이 주요 고객이 됐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영업도 빼놓지 않는다. 택시 운전기사에게도, 구두 닦는 아저씨에게도 항상 명함을 건넨다. 그는 현재 72주 연속 1주일에 3건의 계약을 체결하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 보험업계에서 ‘3W’라고도 불리는 ‘주당 3건의 계약’은 꾸준함과 성실함의 대명사다. 그는 “일반인을 제외하고, 의사나 변호사 등 특화된 대상만으로 영업을 하면 3W를 유지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항상 누군가를 찾아내야 하는 막막함을 어떻게 해결할까. 시작은 어땠을까. 그는 지인들에게 보험에 가입하라고 조르지 않았다. 다만 아는 사람을 소개 시켜 달라고만 했다. “예를 들어 친구가 나를 위해 보험에 가입했다면 그 친구는 자신이 이미 도와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소개 시켜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인들을 가입시키는데 몰두 하다가 금새 고객자원이 떨어져 1년도 안돼 설계사를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는 것.
그의 첫 고객은 아내였다. 아내에게 상품을 설명하고 계약을 체결할 때, 한마디 충고를 들었다. 너무 자기 말만 한다는 것. 그때 그는 고객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유학경험을 살려 고객의 자녀 유학상담을 해주기도 하고, 이런 저런 하소연도 들어준다. 하지만 보험 설계사란 상대가 지루하더라도 약관설명이나 상품 설명 등을 소홀히 할 수 없는 법. 그때는 명확하게 이야기 한다. “이것은 지루하시더라도 꼭 들어야 합니다. 의무 거든요”라고.
상대가 이미 가입한 금융상품도 정말 좋은 상품인지 어떤지 확인해준다. 보험상품뿐 아니라 펀드, 은행예금 등 모든 상품이 경쟁상대다. “과거 상품 중에는 70세까지만 보장되는 등 손해가 되는 상품이 있다”며 “그런 것은 과감해 깨라고 권고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 좋은 상품이라면, 경쟁사의 상품이라고 해도 절대 해지를 권고하지 않는다.
그는 자발적으로 주 7일 근무한다. 주말에는 지방에 있는 고객을 만나러 간다. 제주도에도 고객이 있다. 새로운 고객을 소개 받을 때 “소개만 시켜주시면 미국에라도 갑니다”라고 말한다며 웃었다.
보험영업은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신뢰를 쌓는 ‘휴먼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무척 매력적이라고 설명하지만, 어려움도 많다. 일단 한 두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고, 3~4시간 이상 기다린 적도 많다. 고객이 불편해 할까 봐 로비나 사무실에서 기다리지도 않고 건물밖에 나가서 기다린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금새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런 것에 자존심을 걸지 말자는 결론. 자존심을 걸 데는 따로 있다. 바로 상품. 자신 있고, 정말 좋은 상품이면 세게 밀고 나가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 이렇게 해서 10명의 고객을 만나면, 3명의 계약을 성공시킨다. 연봉의 30%도 고객관리에 투자한다.
지금까지 고객 중에 딱 한명이 펀드로 갈아타겠다고 해약했는데, 그는 “그 고객에게 상품의 좋은 점을 더 잘 설명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내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를 만난 4일에도 한 고객을 2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가 가장 우울하다”는 그는 기다리는 시간도 행복해보였다.
당찬 꿈도 있다. 이미 국내재무설계사(AFPK) 자격증은 획득한 그는 ‘3W’를 100주 채우고 난 다음에, 좀더 짬을 내서 국제공인재무설계사(CFP) 시험공부를 할 생각이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종합 재무 컨설팅 회사를 운용하는 게 목표다. 지금 고객들과의 신뢰는 그 밑거름이 될 것이다.
■ 박연범 FP의 10가지 고객관리 노하우
①전화로는 절대 상품을 팔지 않는다.
②지인에게는 상품을 파는 대신,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만 부탁한다.
③자신의 말을 하기보다 고객의 말을 더 경청한다.
④고객을 기다리는 중에 고객주변 사람에게도 어떤 보험상품에 가입해 있는지 가볍게 묻는다. 바로 가입을 권하지는 않으며, 다음기회에 상품을 정리해서 보여준다.
⑤고객이 이미 가입한 경쟁사 상품이 좋은 상품이라면, 절대 해약을 권고하지 않는다.
⑥고객과는 늘 다음 약속을 기약하는 아이템을 만든다. 무료 건강검진권이나 증정품 등이 있으면 직접 만나 전달한다.
⑦고객의 비즈니스에도 도움을 준다. 병원에는 환자를 소개 시켜주고, 고객이 운영하는 음식점도 추천한다.
⑧아무리 부유해 보이는 고객이라도, "돈이 없어 가입하지 못한다"고 할 때는 "그러실 리가 있느냐"는 등의 무례한 반응은 삼가야 한다.
⑨상품에 대해서는 자존심을 세운다. 고객에게 맞는 상품이라면 적극적이어야 한다. 상품설명은 쉽게, 꼭 설명의무가 있는 부분은 명확히 이야기 한다.
⑩고객을 기다리는 시간은 몇 시간이라도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다. 내 스케줄 때문에 고객의 일을 방해하기는 싫다.
이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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