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자베스 보튼 데 트레비뇨 지음ㆍ김우창 옮김/ 다른 발행ㆍ280쪽ㆍ1만1,000원
여기 한 사내가 있다. 그는 소매 없는 외투의 한 자락을 오른손으로 움켜 잡은 채 평온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목을 장식하고 있는 길고 뾰족한 흰 깃은 사내의 구릿빛 피부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17세기 스페인의 대표화가였던 벨라스케스(1599~1660)가 자신의 몸종이었던 이 사내 후안 데 파레하를 그린 초상화는 1970년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550억원에 팔렸다. 미국의 전기작가 엘리자베스 보른 데 트레비뇨는 그 자신이 화가이기도 했던 후안 데 파레하의 시선으로 두 사람의 일생을 추적하며 자유와 예술, 우정의 문제를 그려낸다.
스페인 창고지기와 흑인 여자 노예 사이에 태어난 후안 데 파레하가 살았던 17세기 스페인은 노예가 ‘장인은 될 수 있으나 예술은 할 수 없는’ 사회였다. 작가는 벨라스케스를 위해 이젤을 옮겨주고, 물감을 개주고, 캔버스를 준비해주던 후안 데 파레하가 어떻게 내면 속에서 꿈틀거리는 예술혼을 발휘하게 됐을까 상상력을 발휘한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골방으로 들어가 밤을 새며 소묘연습을 하고 습작을 남기던 그가 검은 피부를 가진 성모마리아 그림을 그리는 전위적 화가로 거듭나는 과정은 감동적이다. 또한 발길질을 당하며 팔려가는 유년시절의 비참한 삶, 신분이나 피부색에 개의치 않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과의 교유, 예술가로서의 거듭남 등 드라마틱한 전개는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신뢰감 있는 번역의 뒷받침을 받으며 안정감을 더한다.
“예술은 진실이야. 장식이 없는 진실, 감상이 끼지 않는 진실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야.” “예술은 진실해야 한단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 중에서, 가장 엄격히 진실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야. 만약 예술이 진실하지 않다면 그건 값어치 없는 것이란다” 같은 근사한 예술론을 음미하는 의미도 적지않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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