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에게 늙지 않는다는 것은 축복이기보다 고통이다. 스무 살의 뜨겁고 날카로운 심장으로 노년에 이르는 일은 마치 영혼의 혈우병을 앓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아무리 상처 부위를 눌러도 멈추지 않는 피흘림.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소설 <촐라체> 를 연재하는 새로운 매체실험을 성공리에 마친 소설가 박범신(62ㆍ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씨. 그가 꼭 그랬다. 촐라체>
1973년 등단 이래 쉼 없이 소설을 써오고 있는 그를 두고 새삼스레 ‘제2의 전성기’ 운운하는 풍문도 들려오지만, 35년째 ‘현역작가’로 사는 일의 어려움과 즐거움에 대해 말할 때 그의 굵은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분했다.
80년대 스타작가에서 90년대의 돌연한 절필, 이후의 문학 복귀와 교수직 사퇴와 복직까지 그의 행보는 늘 숨가빴다. ‘영원한 청년작가’라는 말을 별명처럼 달고 다니는 그는 늙지 않아 좋아보이기도, 슬퍼보이기도 했다.
-네이버 연재 당시 100만명 이상이 보고 간 걸로 화제가 됐는데요, 이런 반응을 예상하셨나요?
“읽은 걸로 치면 작년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것 같아요. 나는 처음 연재할 때부터 흥행에 성공 못하리라고 생각했어요. 일단 내가 나이도 많고 인터넷이라고 해서 소설의 층위를 낮춘다거나 타협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오히려 인터넷이니까 더 클래식하고 정통적인 문장들로, 특히 젊은이들한테 하고 싶었던 얘기를 써야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뜻밖에 젊은 독자들한테 반응이 좋았어요. 인터넷을 왔다갔다하는 젊은이라고 해서 꼭 수준이 낮은 글들만을 원하는 게 아니라 보다 클래식한, 좋은 소설을 원하고 있다는 걸 느꼈죠. 나한텐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동안 ‘소설의 죽음’을 많이 얘기했는데, <촐라체> 의 성공을 보면 그게 소설의 죽음이 아니라 ‘책의 죽음’이었던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소설의 매체가 본질적으로 달라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촐라체>
“소설은 본질에 반응하는 거고, 본질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본능 중 하나예요. 80년대에 비해 시장을 잃은 것처럼 보여도 소설이 사라지거나 소설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없어지지는 않아요.
그런 면에서 본질적으로 위기는 아니라는 생각이고, 오히려 이렇게 자본주의 경쟁에 매몰돼 갈수록 좋은 소설에 대한 욕망은 내부에서 더 커질 수도 있죠. 작가가 열심히 쓰고 있는 한 그에겐 위기가 아니죠.
설령 네이버에 <촐라체> 를 쓰는 게 흥행에 성공하지 않았더라도 위기라고는 생각 안 해요. 매체도 달라진다기보다는 확장되는 거라고 보고요. 문학 마당 하나를 넓힌 것에 대해선 보람을 느낍니다.” 촐라체>
그는 80년대를 일류 영화배우 못잖은 스타로 살았다. 강연을 가면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사인회를 하면 줄선 이들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불의 나라> 와 <물의 나라> 는 합쳐 100만부 이상이 팔렸고, <풀잎처럼 눕다> 는 수십만부가 팔린 스테디셀러다. 특히 그의 많은 소설들이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그는 누구보다도 대중들과 가까운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풀잎처럼> 물의> 불의>
-등단하신 지 올해로 35년인데,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십니다. 많은 작가들이 전날의 명성에 안주하거나 사라지는 데 반해 늘 현역으로 계신데요.
“그렇죠. 80년대에서 90년대 전반기까지는 이른바 대중에게 영향력이 강한 인기작가였던 시절이고, 그리고 절필을 했죠. 절필 이후 쓴 소설 중에는 사실 <촐라체> 를 제외하면 베스트셀러를 낸 적이 없어요.(3월5일 발매된 <촐라체> 는 현재 1만4,000부가량이 팔렸다.) 촐라체> 촐라체>
하지만 그 시간은 본격문학판으로 되구부려져 돌아온 시기였다고 할 수 있죠. 이른바 인기작가로부터 순수문학 안으로의 회귀 같은 게 내가 그려온 사이클인데, 양쪽 모두에서 비교적
. 나에게 소설이란 당대를 반영하는 거예요. 30대에 난 인기가 있고 싶었어요. 베스트셀러를 낸다는 건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사랑을 받는 거라고 느꼈거든요. 30, 40대에는 젊으니까 당연히 사랑받고 싶지요. 그래서 그 당대의 내 욕망들을 반영했던 거지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받는 게 사랑이겠나, 한 여자의 깊은 사랑을 받는 것이 더 좋지 않겠나 하는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죠. 팔리든 안 팔리든 문학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이 이해하는 계층의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을 갖고 살았어요.
작가마다 자기가 끌고 가는 작가로서의 사이클이나 지향이 있을 텐데 내 경우는 내 지향이 나를 진실로 반영한 것이므로 전혀 후회 없고, 잘 지내왔다고 생각해요.”
-절필 이후의 작품 중에 큰 베스트셀러가 없어서 그런지 역설적으로 대중적인 이미지가 아직도 강한 편이세요.
“대중작가라는 말에 동의가 안 되지만 대중성을 갖고 있다는 말에는 동의해요. 그거 좋은 거 아닌가요. 80년대에 썼던 내 소설들은 일종의 세태?반영한 소설들이었고, 젊은 작가로서 굉장히 의미 있는 작업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전 시대와 지금을 그런 방식으로 구분하는 건 나한테 굉장히 폭력적으로 느껴져요. 작가가 대중들과 가까운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죠. 별 후회는 없습니다.”
-1~2년에 한 권씩 소설을 발표하실 정도로 왕성한 다산성의 작가이십니다. 비결이 있을까요?
“내 안에는 어떤 나이 먹지 않는 짐승이 한 마리 들어있어요. (가슴을 가리키며) 여기에 정말 어떤 짐승이 있어요. 일종의 예술적 자아죠. 나이도 없고, 삶에 대해 내공도 안 쌓이고, 늙었다고 해서 둔해지지도 않고, 아주 예민한 상태로 있어요. 내가 열심히 쓰고 있는 한 이 짐승은 가만히 있는데 이 짐승이 내가 방심하고 있으면 옆구리를, 생살을 뚫고 나와요.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죠.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부의 짐승한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늘 쓰는 거예요. 앞으로 나가고 있어야 이 놈이 고요하게 있어주니까. 근데 이 안에 있는 놈이 용트림을 하고 옆구리를 찢고 나오면 정말 힘들죠. 죽고 싶죠.”
- 그 짐승의 정체랄까요,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어디에 가 닿을까요. 상처일까요?
“아마도 그렇겠죠. 내가 절필하고 있을 때(93~96년) 그 연원이 어딘가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절필은 여러가지가 원인이어서, 한 가지로 말할 수가 없어요.
생물학적으로 중년에 이르러 느끼는 어떤 존재론적인 한계, 그동안 소설을 너무 많이 써서 오는 스트레스, 80년대 강고한 민족주의가 줬던 억압 등 수많은 이유가 있었죠. 그런데 추적해보니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어렸을 때 가졌던 내 안의 상처들이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마흔 한 살에 나를 낳으셨는데, 오직 아들 하나 바라고 심야에 산파도 없이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나를 낳았어요. 딸이면 엎어놔 죽이려고요.
그러니 내 입장에선 살의가 가득한 세상 속으로 나온 것이죠. 사랑 속에서 태어나도 불안한데, 우리 어머니는 이를 벅벅 갈면서 날 죽인다고 하니까, 나로선 살기가 가득한 세상 속으로 나온 거죠.
우리 어머니가 주었던 상처와 사랑, 아마 평생 나는 어머니한테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난 늘 어머니의 사랑에 데일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어요. 그것이 너무 과격하고 과했기 때문에 늘 불안하게 자랐죠. 그래서 늘 집안에 불화가 끊임없었고. 내가 가진 최초의 세계인식은 불화였어요.
세계는 불화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열 여섯에서 등단하기 전인 스물일곱까지 자살미수를 몇 번을 했어요. 요즘엔 그냥 나는 무당으로 태어났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무당에 가깝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소설 안 썼으면 내가 박수가 됐겠지, 이런 생각 많이 해요.”
-절필 선언 이후 글쓰기는 어떻게 다시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절필 후 3년간 용인의 텃밭 딸린 오두막에서 혼자 은거했어요. 어느날 남새밭에서 풀 뽑고 앉아 있는데 내가 막 뭐를 중얼거려요. 처음엔 인식을 못했는데 그게 문장들이더라고요. ‘그는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소설을 중얼거리고 있었던 거예요.
내 안에 뱉어야 할 어휘들이 꽉 차있다고 느꼈죠. 그거 뱉어야 살아요. 그러지 않으면 그 어휘들이 나를 찌르고 달려들죠. 그래서 다시 시작한 거예요.
젊을 때는 원고지 앞에 앉으면 수많은 나비떼들이 날아다녔어요. 내가 고통 받았던 건 그중 어떤 나비들을 핀셋으로 잡아다가 내 원고지 공간에 넣느냐, 수많은 이미지와 어휘들이 동시에 자기를 써달라고 아우성치는데, 내가 원고지 공간에 앉혀야 할 나비는 한 마리뿐이잖아요.
그런데 절필할 무렵에는 나비가 잘 안 날더라고. 한 3년 지나서 남새밭에 앉았는데 나비들이 잔뜩 날고 있었어요. 황홀하지요. 그래서 쓴 거예요.”
히말라야 촐라체의 빙벽을 오르는 두 형제의 이야기를 그린 <촐라체> 에는 작가 자신인 것이 분명해 보이는 화자가 아들의 출가로 인해 상처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미 없이 기른 아들은 왜 스님이 되려 하느냐는 아비의 물음에 “그리워서요”라고 답한다. 촐라체>
실제가 아닐까 궁금증이 이는 이 부분은 그러나 자식에 대한 측은지심과 연민만이 사실과 부합한다. 그는 평생을 일부일처제와 가부장제에 성실하게 ‘봉직’해온 작가로 유명하다.
_에세이집 <맘 먹은 대로 살아요> 에서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나면, 첫째 아버지가 되지 않을 거고, 둘째 소설가가 되지 않을 거고, 셋째 누군가의 남편이 되지 않겠다”고 쓰셨는데요, 가족과 소설로 삶의 대부분을 채우신 분이 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셨어요. 맘>
“지금 돌이켜 보면 두 가지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나를 받치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문학순정주의고, 다른 하나는 인간주의예요. 그 인간주의로 말하자면, 소설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고 삶에도 그대로 적용돼요.
일단 가까운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겹고 그래요. 살아있는 모든 게 그렇죠. 특히 나이 먹어서 그게 심해지고. 가장 눈물겨운 건 우리 아이들이죠.(그는 2남1녀를 두었다.)
이런 시대 어떻게 살아남고 어떻게 자기 것을 지켜갈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 애들을 보면서 밤잠이 안 오죠. 내가 철 모르고 낳았다, 걔들이 앞으로 이 세상에서 자기 일가를 이루고 자기 소중한 꿈들을 어떻게 지켜갈까, 이런 시대에 자라나고 크고 때로 괴로워하는 거 보면 정말 내가 철이 없어서 아이들을 낳았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 노릇을 한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인 것 같아요.
아내도 마찬가지죠. 늙어가는 아내를 보는 게 저한테는 소설을 보는 것과 똑같아요. 소설도 허구헌날 때려치고 싶었고, 이걸 지켜간다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뭐 아내라고 안 그랬겠습니까. 소설과 아내를 감각적으로 얘기하면 난 구분이 안돼요. 내가 20대에 맹세했던 것도 두 가지밖에 없어요.
우리 마누라한테 죽을 때까지 우리 함께 살자고 맹세했고, 죽을 때까지 소설을 쓰고 살겠다고 맹세했어요. 둘 다 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었지만 이승의 맹세니까 지켜가야 되지 않겠나 하고 살았어요. 그치만 뭐 다시 태어나서도 그 짓을 할 필요는 없는 거지요.(웃음)”
-<외등> 과 <주름> 같은 소설들은 존재를 거는 치열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성실한 가장으로 살아가는 실제와 달리, 모든 것을 다 내팽개치는 그런 사랑을 그리시는데요. 주름> 외등>
“그렇죠. 가장으로서 성실하게 있을 때도 내 안의 짐승은 불타고 있는 거죠. 그 짐승이 하는 말이 소설이니까. 가족들과 사회적 자아로 말하다가도 내 방에 올라가 문을 잠그고 원고지를 펼쳐놓고선 짐승의 말들을 받아 적는 거죠. 나도 어떤 때는 내가 사기꾼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어요.(웃음)
평생 그 두 가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거죠. 삶이란 게 결국 끝없는 유랑과 회귀의 반복이에요. 원심력을 따라 가고 떠나고 나면 되돌아오고 싶은 게 인간 아니겠어요.
난 가족에 대한 책임을 유기한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소설가라고 해서 자기가 진실로 사랑하고 맹세했던 사람한테 책임을 유기할 권리가 있는 겁니까. 그래서 나는 쪼다 같은 작가예요.(웃음)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가 될 수 없어요. 그것은 인간에 대한 내 연민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너무 강해서, 아, 난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없구나, 콤플렉스로 생각해요.”
지난 10여년간 그는 히말라야에 매료돼 있다. 답답하고 짜증날 때면 짐을 싸 훌쩍 히말라야로 떠난다. 2005년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때려치우고’ 한 일도 히말라야 산행이었다.
-히말라야가 왜 그렇게 좋으십니까?
“히말라야는 초월적 세계의 그림자예요. 어디를 걷든지 설산의 스카이라인이 따라와요. 내눈엔 그게 불멸, 영원성의 한 그림자 같죠. 10년간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건 시간의 문제거든. 삶의 유한성을 내가 어떻게 이겨내고 핸들링해야 하는가 나한테 너무 절박하고 고통스런 문제예요. 히말라야 가면 그런 것들이 명료해지죠.
히말라야에 가면 바로 초월적 세계와 몸부림을 치고 있는 현실 사이의 경계를 걷는 느낌이 있어요. 영원성과 찰나적인 것의 사이, 불멸과 영원성의 사이. 그 둘을 눈으로 다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잖아요.
이거 사회가 좀 미친 거 아닙니까. 나는 제정신이라고 생각 안 해요. 이건 220볼트 플러그에 100볼트 전열기구를 꽂고 사는 거예요. 나도 그래요. 나는 겨우 100볼트 냉장고인데 220볼트에 꽂혀있으면 내 몸의 코일은 타지 않겠어요. 자본주의 경쟁이 이렇게 가파르게 폭발하는 나라가 있겠습니까.
자연인으로서의 우리 인간은 100볼트 냉장고인데 확대재생산된 욕망의 플러그는 220볼트니까 우리들 내부에서는 코일이 타고 있는 거죠. 뜨거우니까 더 악을 쓰고 달려가는 것이고. 이제 문학이 그야말로 자본과 싸워야 한다고 봐요.
자본이 만들어 놓은 극단적 경쟁구조는 끝없이 인간을 이간질시키죠. 히말라야 가면은 내가 자연인 100볼트 그대로고, 내 코드가 서울의 220볼트의 플러그에서 빠져나오니까 좋아요.”
-청년작가라는 별명은 마음에 드십니까.
“내가 죽을 때까지 갖고 있는 작가로서의 소망은 현역작가로 살겠다는 거예요. 나는 대하소설을 쓸 마음도 없고, 권위적인 나이에 알맞은 형식과 소재를 찾아 헤맬 바에야 차라리 싸구려 연애소설을 쓰고 말 거예요.
예민한 감수성으로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형식에 대해 무한히 도전하고 돌파해야죠. 나이에 합당하게 사는 게 편안한데 나는 그게 잘 안돼요. 글쎄…, 왜 나는 내공이 안 쌓일까요? 세상에 대해서… 상처에 대해서…
박선영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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