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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개인사 털어놓은 산문집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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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개인사 털어놓은 산문집 발간

입력
2008.04.0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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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5월11일 12시30분. 그가 쓰러졌다. 점심으로 국수를 먹던 중이었다. 내 생일날 그가 쓰러졌다. (중략) 으윽… 뭐 그런 소리였는지 무슨 소리가 분명 들렸는데 그는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찰나를 받아 안았다. 나는 그 순간 운명을 안아 버린 것이다.”(19~20쪽)

신달자(65) 시인이 신산했던 30년 결혼 생활의 사연을 고스란히 담은 산문집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민음사 발행)를 펴냈다. 신씨가 그간 발표한 시나 산문에서 그의 가정사에 심상찮은 곡절이 있음을 감지했던 독자일지라도, 그가 애제자 ‘희수’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써내려간 이 직정(直情)한 이야기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

신씨가 어떤 글에서 “세상에 더는 없는 불행한 연애”-시집 <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 (2001)의 수록시 ‘고백’에서 ‘불행’의 연유를 눈치챌 수 있다-라고 불렀던 것을 거쳐 맞은 대학교수 남편은 결혼 9년만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23일의 혼수상태를 거쳐 깨어났지만 반신불수가 됐다.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자기에게 거는 자존심 때문”(63쪽)에 시인은 헌신적 간호를 통해 남편을 복직시켰지만 이후 24년간 이어진 병수발은 “차라리 미쳐 버리고 싶었”(77쪽)던 시련의 나날이었다. 뇌손상으로 성격이 변해가는 남편, 주변의 동정과 조롱이 섞인 시선, 부잣집 딸로 자란 시인을 보따리 장수로 내몬 기울어진 살림….

비극은 겹쳤다. 여든한 살이던 시어머니가 척추 뼈가 부서지는 낙상을 당한 것. 시인이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해 마흔에 석사 학위를 따고 막 대학강사 자리를 얻은 때였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대들었다. 나를 놀리시는 겁니까. 당신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짐 진 자는 나에게 오라,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185쪽) 시모는 꼬박 9년을 자리보전하다가 91년 세상을 떴다.

2000년 남편마저 떠나보낸 시인을 병마가 급습했다. 2005년 유방암 선고를 받은 날의 순간을 시인은 이렇게 전한다. “병원은 2층이었는데 나는 그 한 층의 계단을 내려오는 데 20분쯤 걸렸다. 두 다리가 떨려서 도저히 내려올 수가 없어.”(247쪽)

3일 오전 인터뷰를 약속한 서울 강남구 한 커피숍에 신씨는 조금 늦게 나왔다. 전날밤 막내딸(33)과 출간 자축 겸 와인을 마시며 나눈 남편에 대한 추억담이 그만 새벽3시까지 길어졌다고. 그는 이번 책 원고가 남편 타계 이듬해인 2001년에 이미 써둔 것이라 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줄기였던 남편과의 세월을 잊어버릴까 싶어 황급히 기록해뒀다.

출판사의 출판 제안을 받고 수락할 때까지 정말이지 수백 번은 결정을 번복했다.” 유명 작가에 대한 엿보기 심리가 그토록 부담스러웠음에도 고통의 기록을 세상에 내놓기로 한 이유를 신씨는 “나처럼 환자 가족을 둔 보호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싶었다”고 말했다.

시인은 불행한 시절을 견뎌낸 힘으로 종교와 문학을 들었다. 책에서 밝혔듯 그는 부군의 투병 6개월째 되던 날 영세를 받았다. 시인은 “피폐한 삶을 차마 사람들 앞에 보일 수가 없었다”며 “새벽 한두 시에 성당 성모님 앞을 찾아가 많이도 울고 투정했다”고 회고했다. 그 투정 중엔 “저 이렇게 살면 시는 잘 쓰게 해줄 겁니까”란 것도 있었다.

“지금 겪고 있는 삶의 고통들이 언젠가 내 문학을 살찌우는 영양제 노릇을 할 것이란 꿈이 나를 견디게 했다”는 시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만남-헤어짐, 생성-소멸 등 실존적 문제를 천착해온 그의 시적 주제와 그것을 담아낸 격정적 시어의 원천을, 독자는 이번 산문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 죽거든 결혼하지 마”(237쪽)라는 유언을 남기고 시인의 남편은 부인과 세 딸, 손자들이 임종하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시인은 남편이 참 복되게 떠났다고, 자신도 지나고 보니 고통스러웠던 일보단 잘 견뎌낸 일만 남더라고 했다. 이를 ‘가족의 힘’이라 했다.

“아이들만 데리고, 혹은 아이들마저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고통스럽더라도 가족과 함께 하는 것만큼 더 좋은 건 없다는 걸 알겠더라고.”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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