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 문학동네
“남중국해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갑판 위를 넘실거리던 4월의 어느 봄날, 일포드 호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닻을 올렸다. 드디어… 1,033명의 조선인들은 외교관은커녕 교민 하나 없는 멕시코를 향해 출발하였다. 1905년 4월 4일의 일이었다.”
103년 전 오늘, 조선인 1,033명이 제물포항에서 영국 기선 일포드 호를 타고 멕시코로 갔다. 황성신문의 광고에서 본 묵서가(墨西哥ㆍ멕시코) 애니깽(에네켄) 농장을 지상낙원으로 꿈꾼 이들이었다. 4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 ‘녹색의 황금’ 애니깽이 경제적 자립과 밝은 미래를 열어줄 것이라 믿었다.
조상의 위패를 짊어진 몰락한 황족, 대한제국 군대의 제대병, 청을 오가던 통역관, 파계 신부, 도둑, 박수무당, 부모 잃은 고아가 그들 중에 있었다. 자신들이 멕시코로 떠난 지 얼마 후에 사라져 버릴 국가, 이미 거기서 버려진 이들이었다.
김영하(40)의 소설 <검은 꽃> (2003)은 그들의 이야기다. ‘애니깽’이라는 말에 집약되는, 한인 멕시코 이민사의 아픔은 1980년대 후반 연극연출가 김상열(1941~1998)이 쓰고 무대에 올린 작품을 계기로 알려지면서 영화, 뮤지컬, 소설로 다양하게 변주됐다. 검은>
김영하도 같은 소재를 취했지만, 그가 쓰는 방식은 그러나 전혀 다르다. 애니깽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했던 조상들의 사연도 아니고, 근대사의 민족 수난을 다룬 역사소설도 아니다.
비인간적 착취의 4년이 지난 후에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들은 남ㆍ북미를 떠돌며, 혁명과 내전에 휘말리고, 마야의 밀림지대에서 ‘신대한’이란 국호로 그들만의 나라를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흔적 없이 스러진다. <검은 꽃> 은 그 스러짐의 이야기다. 검은>
김영하는 그들 삶의 행로 추적을 통해 1,033명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보편적 인간 운명의 이야기로 다시 쓰고 있다. 사실과 상상력 사이의 간극을 삭막하리만치 냉정한 문장으로 메워버리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김영하의 소설은, 역시 흡인력이 강하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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