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창미
1948년 4월 3일 제주4ㆍ3사건이 일어났다. 4ㆍ3은 1947년 제주읍 3ㆍ1절 기념집회 시위군중에 대한 발포로 6명이 희생된 것을 기점으로, 1948년 남로당 제주도당의 5ㆍ10선거 반대투쟁으로 촉발된 무장봉기가, 1954년 9월까지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무력충돌과 군경의 진압 과정에서 제주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2003년 확정된 정부의 제주4ㆍ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인명 피해는 2만5,000~3만여명. 당시 제주도민은 30만여명이었다.
비극의 기억은, 한 편의 소설은, 어떻게 역사를 다시 쓸 수 있을까. 올해가 60주년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4ㆍ3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30년밖에 안 된다.
그 전에 ‘그 죄악은 30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본 적이 없었다.’ 소설가 현기영(67)이 <순이(順伊) 삼촌> 에서 쓴 구절이다. 그가 1978년 발표한 이 짤막한 한 편의 소설을 통해 비로소 제주 사람들의 기억으로만 전해지던 4ㆍ3이 양지로 드러났다. 그리고 30년이 더 걸려 올해 ‘제주4ㆍ3평화기념관’이 건립됐다. 기억의 시간, 역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순이(順伊)>
순이 삼촌은 여자다. 나중에 ‘북촌 사건’으로 밝혀진, 소설에서는 ‘1949년에 있었던 마을 소각’으로 표현된 진압군의 제주시 조천읍 북촌마을 주민 400여명 학살 현장에서 스물여섯살이던 삼촌은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삼촌은 오누이를 묻은 곳에, ‘눈에 띄는 대로 주워냈건만 잔뼈와 납탄환은 삼십년 동안 끊임없이 출토되는’ 옴팡밭에 고구마를 심으며 살아왔다.
소설은 그 밭에 순이 삼촌이 스스로 목숨을 묻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카가 회상하는 기억이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그때 일곱살이던 조카소년이 자라서 쓴 그 처절한 비극의 기억, 소설 한 편은 우리 현대사를 꿰뚫는 탄환이 됐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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