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 중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32일치 분량의 일기로 추정되는 자료가 확인됐다. 난중일기>
문화재청은 2일 노승석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에게 의뢰해 2006년부터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 를 판독ㆍ번역한 결과, 지금까지 전해진 이순신의 친필인 <난중일기> 초고본과 조선시대 정조의 명으로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목판본에서는 볼 수 없는 총 32일치 분량의 자료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
이 32일치는 <난중일기> 초고본에는 전하지 않는 을미년(1595년) 기사가 29일치나 포함돼 있으며 정유년(1597년) 1일치, 무술년(1598년) 2일치이다. <난중일기> 초고본에는 임진년(1592년)부터 무술년(1598년)까지의 일기가 담겨있으나 을미년 일기는 빠져있다. 난중일기> 난중일기>
새로 확인된 자료에는 "오늘이 바로 회(맏아들)가 혼례를 올리는 날이니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1595년 정월 21일), “내일이 부친의 생신이신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7월1일)는 등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내용이 있다.
또 “아침에 원수(권율)의 계본과 기ㆍ이씨 두 사람의 공초(죄인의 진술)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없이 망녕되게 고한 일들이 많았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4월30일),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천지사이에 이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11월1일)라며 다른 장수들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 “우리나라의 병사들이 쇠잔하고 피폐한데 이를 어찌하랴”(11월4일)라고 적기도 했다.
<충무공유사> 는 <난중일기> 친필 초고본 등과 함께 충무공 종가인 덕수 이씨 집안에서 보관돼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 <난중일기> 초고본, <이충무공전서> , <충무공유사> 를 비교해 보면 이번에 발견된 부분도 원래 <난중일기> 초고본에 들어있었지만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 를 간행한 이후 초고본에서 누락된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한 내용이 많아 이것이 누락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 충무공유사>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 난중일기> 충무공유사>
<충무공유사> 는 신경(1613~1653)이 쓴 <재조번방지> 에서 이순신과 관련된 내용을 초록한 ‘재조번방지초’, 봄가을로 이순신 사당에 제를 올릴 때 쓴 제문인 ‘춘추제향문’, 이순신 사당을 잘 정비하도록 조정에 올리는 글인 ‘삼도회문’, <난중일기> 초고본에서 중요한 부분을 추려 옮겨적은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초(日記抄)’, 임진왜란당시 이순신 휘하에서 싸운 장졸 403명의 명단 등 9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난중일기> 재조번방지> 충무공유사>
노 교수는 “<충무공유사> 는 <재조번방지> 가 간행된 1693년 이후 이순신 장군과 관계된 집안 사람이 <난중일기> 초고본 중 중요한 부분을 추려 옮겨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난중일기> 재조번방지> 충무공유사>
■ 충무공유사, 67년 일본으로 밀반출 위기도… 박 전 대통령 지시로 영인
충무공 종가에서 전해내려오던 <충무공유사> 는 건국 후 <난중일기> 초고본 등과 함께 아산시 등을 거쳐 국가 관리 하에 들어갔다. 1967년 12월 아산 충무공유물전시관에서 다른 서적 10권과 함께 도난당했으나 경찰이 부산에서 고추장 단지에 담아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는 것을 되찾아 청와대로 공수했다. 이순신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영인본이 만들졌으며, 표지의 글자 판독이 어려워 첫번째 소제목을 따 박 대통령 친필로 '재조번방지초(再造藩邦志抄)'라는 제목을 붙였다. 난중일기> 충무공유사>
남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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