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 세상에 이 남자처럼 화끈하게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또 있을까. 영화라는 표현매체를 쇠망치 삼아, 그는 눈 앞의 부조리를 부수고 으깬다. 한바탕 신나게 두드린 다음, 혓바닥을 쑥 내밀고 조롱해 주는 것은 보너스. 뒤틀린 현실을 무자비하게 꼬집는 풍자의 통쾌함은 가히 살인적이다. 이번에 걸린 상대는, 미국의 의료보험제도.
내용은 이런 거다. 한 남자가 목공 작업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잘려나간 중지와 약지를 들고 병원을 찾아간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6만달러짜리 중지 봉합수술을 받을 것인가, 1만 2,000달러짜리 약지 봉합수술을 받을 것인가. 그나마 약지에는 ‘바겐세일’을 해주는 미국 의료제도에 감사하며, 남자는 결혼반지를 낄 손가락을 붙인다.
엉망진창 의료제도를 비트는 익살은 후유증에 시달리는 9ㆍ11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에서 정점에 이른다. 반짝 영웅 대접을 받은 뒤, 이들은 최소한의 의료혜택도 받지 못하고 방치됐다. 무어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정부의 주장에 의하면)‘무료로, 보편적인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들을 데려간다. 테러 혐의자들이 수감된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로.
무어는 미국의 의료체계가 ‘쿠바보다 못한’ 쓰레기가 된 까닭을 정치에서 찾는다. 하지만 무겁지 않다. 의회 지도자들의 머리통에 가격표를 달고, 그들이 제약ㆍ보험업체로부터 걷은 후원금 액수를 적어 넣는 식이다. 기득권세력의 비밀병기가 사회주의 망령과 가족주의 신화라면, 무어의 비밀병기는 바로 무시무시한 유머감각이다.
그러나 마냥 배꼽을 잡고 킬킬대다간 이 영화가 지닌 이중성을 간과하기 쉽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영화는 ‘사실성’이라는 기본을 비켜간다. 무어는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사실을 과장하고 때로 왜곡한다. 예를 들면, 무어는 미국의 처참한 현실을 부각하기 위해 영국 의료제도를 이상향으로 그린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 영국 시민들은 스페인으로 원정 진료를 떠나고, 스페인 시민들은 노르웨이의 제도를 부러워한다. 그것이 진실이다.
하지만 무어의 영화에서 이런 부분은 지워져 있다. 이것이 무어가 영화를 만드는 ‘화끈한’ 방식이다. 매력인 동시에 한계다. 엄밀히 말하면, 무어의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페이크 다큐(Fake Documetary), 그리고 다큐드라마(Docudrama)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 따라서 이 영화를 한국이 도입을 추진 중인 신자유주의 의료제도에 맞서는 ‘전투 교범’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반격을 받기 쉽다.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프로파간다 도구라면 몰라도. 3일 개봉. 12세 관람가.
유상호 기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