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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역사가 얼굴을 바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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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역사가 얼굴을 바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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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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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대는 국민학교(‘초등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뀌기 전이다)에 입학하면서부터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 사명을 완수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외우지 못하면 그 어린 국민학생들이 ‘원산 폭격’을 예사로 당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글자 한 자, 문장 한 줄은 그대로 지상명령이었다.

혁명과 의거를 구분하지 못해도 5ㆍ16은 혁명이어야 했고 4ㆍ19는 학생의거였다. 역사니까, 그것도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니까, 오류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에도 잘못이 있을 수 있으며, 사실의 해석과 평가도 사관이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또한 우리는 배웠다.

대안 교과서로 만들어졌다는 <한국 근ㆍ현대사> 라는 책이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해서 일부러 구해서 봤다. ‘대안’이라지만 어쨌든 교과서라는 것으로는 오랜만에 보는 책이다. “대한민국은 이 같은 한국사의 기본 흐름에 부응하여 근대 문명을 도입하고 이식함에 있는 힘을 다하였던 개항기의 개화파에서 출발하는 독립운동 세력과 근대화세력이 세운 국가였다.”(P276) 이 책은 결론 부분에서 대한민국을 ‘개화파’와 ‘근대화세력’이 세운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개화파에 관해서는 학계에서도 관점들이 다르기 때문에 차치하더라도, 이 책이 말하는 근대화세력은 어떤 세력일까. “‘조국근대화’에 강렬한 포부를 가진 장교 집단이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엘리트 집단으로 부상하였다”(P169)고 쓰고 있는 세력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대한민국 탄생 이후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그리고 급진좌파 세력의 투쟁으로 읽힌다.

그리고 ‘5ㆍ16 이후의 근대화혁명에 근본주의적 대립을 보여온’(P236) 민주화 세력이나 급진좌파 세력이 ‘우군으로 활용’(P270)하고 있는 민족주의는 폐기되어야 할 낡은 시대의 유물로 기술되고 있다. 문화 분야 서술에서는 한층 더하다. 1960~80년대 우리 사회 민주화과정에서의 커다란 기여를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문학 분야를 ‘문학적 직관만으로 현실의 모순을 역사로 환원시키는 경향’(P238)이라고 비하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 책에 대해서는 많은 문제점의 지적과 비판이 있었으므로 하나하나 그것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를 외워야 했던 세대로, 철 따라 옷 갈아 입는 것도 아닌데 수시로 얼굴을 바꾸고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를 보는 마음은 서글프다.

언제까지 선진화를 지상 목표로 내세우며 우파와 좌파를, 엘리트와 민중을 대립시키면서, 교과서 한 자 한 자를 백지가 먹물 빨아들이듯 흡수할 다음 세대를 우롱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은 또 세월이 지나 역사 교과서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청소년정책연구원이 중ㆍ고교생 6,16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지난달 말 발표한 데 따르면, 응답자의 50.4%가 ‘다시 태어나면 다른 나라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답했다고 한다. 연구원은 이 같은 조사결과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그들의 실망감의 반영이라고 분석했다.

이 대안 교과서처럼 ‘대한민국이 얼마나 소중하게 태어난 나라인지’(P7) 아무리 교과서가 외쳐도, 거기서 배우는 역사가 입맛대로 얼굴을 바꿀 때, 그 사회에 미래는 없다. 그들은 이미 그걸 알고 있는 것이다.

하종오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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