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1월 어느 날, 의회 사무실에서 지역구로부터 올라온 여론조사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을 때였다. 전화 벨 소리와 함께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전화를 연결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빌 클린턴 대통령이라고 했다. 오후에 바로 자신의 백악관 집무실에서 만나자는 초청이었다.
그 날 오후, 백악관에서 보낸 리무진을 타고 대통령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경호원들의 절도 있는 경례와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집무실에 들어서니, 클린턴 대통령이 손을 잡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클린턴 대통령과는 전에도 백악관에서 몇 차례 만난 일이 있지만 다른 의원들과 함께 만난 것이 전부였고, 둘만의 독대는 그야말로 처음이었다. 그러니 다소 흥분이 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클린턴은 그런 나를 배려한 듯,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골프와 나의 가족에 대한 얘기로 자신과 반대 정당의 초선 의원인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는 내 골프 핸디가 ‘20’이라는 것을 알고, 거리가 짧은 내게 비거리를 낼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는 등 마치 오랜 친구처럼 친근감을 느끼게 대해 주었다.
특히 보좌관들이 조사해 보고했겠지만, 우리 아이들 이름을 모두 알고 안부를 묻는 등 세심한 마음 씀씀이는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통령이 처음 마주앉은 초선 하원의원의 자녀들 이름까지 외워 말하는 데 대해 경위야 어쨌든 그 성의와 기억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린턴은 내 손을 끌고 집무실에 장식해 놓은 각종 그림들과 조각들에 대해 유머 섞인 자세한 설명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본론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클린턴은 이날 대화에서 말끝마다 미국 역사상 유일한 한국계 의원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며 나를 추켜세웠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주는 그의 기술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만남의 주제는 클린턴 대통령이 임기 초 핵심과제로 추진하고 있던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 비준안이었다.
취임 첫 해를 맞은 당시 클린턴에게 NAFTA는 정치생명을 걸다시피 한 큰 과제였다.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노동조합 편을 들어왔다. 전국에 퍼져 있는 각종 노조의 힘은 막강했다. 이들은 NAFTA가 통과되면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이 밀려들어와 미국인들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란 이유로 협정에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노조의 지지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많은 민주당 출신 의원들이 이 때문에 줄줄이 공개적으로 NAFTA를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점에 민주당 출신인 클린턴 대통령의 NAFTA 지지 선언은 많은 민주당 소속 의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클린턴은 이른바 ‘다시 태어난 중도파 민주당원’ (Born-again Democrat, Centrist)임을 내세우며 전통적인 민주당 이념에서는 약간 벗어난 새로운 중도 민주당을 강조했다. 사회복지 분야에서는 철저하게 민주당의 이념에 충실하면서도, 경제와 국방에서는 공화당의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실용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그의 인기는 당시 하늘을 찔렀었다.
NAFTA는 민주당 지도자들과 의원들, 그리고 민주당의 정치적 기반인 노조 등의 맹렬한 반대와 비난을 자초하는 일이었지만 클린턴은 이를 무릅쓰고 NAFTA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사실 NAFTA의 모든 필요한 기초공사는 조지 H. 부시 전임 대통령이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클린턴은 부시 전 대통령이 다져 놓은 국가적 중대사를 마무리하면서 NAFTA 통과에 따른 공을 온전히 자신의 업적으로 만든 셈이다.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자유무역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만큼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NAFTA에 대체로 찬성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클린턴이 속한 민주당 의원들은 대부분이 반대하고 거꾸로 야당인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대부분 찬성하는 형국이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11월 넷째 목요일인 추수감사절 (Thanksgiving Day)을 앞두고 의회가 휴회에 들어가기 전에 NAFTA 비준안이 처리될 수 있도록 의원들 설득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추수감사절은 크리스마스와 함께 미국의 최대 명절이다.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에 이어 12월에는 크리스마스가 이어지고, 그 다음 주는 정월 초하루이기 때문에, 11월 중순만 되면 전국이 일찌감치 축제 분위기로 들썩거린다. 의회도 이 무렵이면 장기간 휴회에 들어간다.
나는 NAFTA 비준을 위한 표결이 임박한 시점까지도 분명한 찬반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지역구가 멕시코 국경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탓에 지역 구민들의 반응을 좀더 두고 보기 위해 며칠을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나를 백악관에 초청한 것은 바로 내가 NAFTA 비준안에 대해 隔甦?(undecided)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30명 정도에 달하는 미결정 의원들의 선택이 비준안 통과에 결정적이라고 본 클린턴은 나를 초청해 단독 회담을 갖기로 한 것이다.
경호원들의 경례와 백악관 비서진의 안내 속에 대통령 집무실로 이어지는 복도를 걸어가면서, 나는 30여 년 전, 세계에서 10번째로 가난한 나라에서 단돈 500달러를 들고 혈혈단신 이역만리 말도 통하지 않는 미국 땅을 밟았을 당시를 떠올렸다.
일본 제국주의에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긴 나라에서 태어나, 동족상잔의 전쟁을 직접 경험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서 이민와 겪은 온갖 고난을 뒤로 하고 당당히 세계 최강국 미국의 연방 하원의원이 된 것에 새삼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미국은 세계 제1의 정치, 경제, 군사 강국이니 미국 대통령은 전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바쁜 인물이 틀림없다. 그런 클린턴과 단독회담을 하기 위해 대통령 집무실로 향하는 내 머리 속에는 지나간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 김창준의 인생역정
청년시절 500弗들고 혈혈단신 渡美… 접시 닦으며 공부 시장·3선 의원 영예
한국인으로 미국에 건너가 미국의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사람은 대한민국 5,000년 역사상 김창준 단 한 사람 뿐이다. 나는 미국에서 태어난 교포 2세도 아니요,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해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한인 1.5세도 아니다.
나는 한국에서 대학까지 다니고 육군에 입대해 제대한 뒤 단돈 500달러를 들고 혈혈단신, 당시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가난했던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를 닦으며 고생했던 1960년대 초의 전형적인 한국인 고학생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캘리포니아의 단간방에 살면서 낮에는 Chaffey College에 다니고 밤에는 식당에서 밤 늦도록 일하며 서툰 영어에, 모든 게 색다른 이역만리에서 고독과 향수병으로 견디기 힘든 세월을 보내기도 했던 그야말로 토박이 한국인이다. 그래서 한 때는 거의 매일 저녁, 조국에 두고 온 부모님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미국행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편입하면서 다행히 온타리오시의 자그마한 신문사(The Daily Report)에서 배달 책임자 일을 맡게 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그곳 공과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캘리포니아 주립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고, 나중에 한양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토목기사로 경험을 쌓은 뒤 39살에 설립한 제이킴엔지니어링(Jay Kim Engineering)이란 건설회사는 나의 삶을 180도 바꿔놓았다. 회사가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사회활동도 많아지고 바빠지면서 아시아 기업인협회 (Asian Business Association) 의 첫 한국계 회장이 됐다.
이후 기업활동을 하면서 중소기업청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으로 부터 자랑스런 기업인 상 등을 수상하면서 김창준이란 이름이 지역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이를 발판으로 시의회 의원과 시장을 거쳐 1992년에 미 역사상 최초의 한국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연달아 3선에 성공했다.
앞으로 연재할 '한국계 최초의 미 연방 하원의원: 김창준의 숨겨진 정치 이야기'는 미국 주류사회의 핵심 일원으로 내 자신이 직접 경험한 미국 정치와 사회의 이면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이들 기록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것이자, 미국의 행정과 정치에 직접 몸담았던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증언이란 점에서 미국의 정치와 사회의 내면을 알고자 하는 분들 모두에게 유익하고 흥미있는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 약력
1939년생- 보성고졸업- 1961년 도미- 1967년 남가주대(USC)졸업- 1969년 남가주대(USC)대학원석사- 1978년 제이킴엔지니어링설립- 1990년 미국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바시 시의원- 1991년 다이아몬드바시 시장- 1992년 캘리포니아주 제41지구 연방하원의원 당선- 1999년까지3선연임- 2005년 인터넷신문 프런티어타임스 회장- 현 중국 칭화대 한국캠퍼스 원장- 워싱턴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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