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아파트로 ○시까지 오세요.' 요구 받은 물건을 벤츠 승용차에 싣고 목적지로 향한다. 차에 실린 제품들은 액수로 따지면 어림잡아 1억~2억원 상당. 초인종을 누르자 중년 여성이 문을 연다. 웃음소리와 정적이 이어지기를 3시간, 문을 나서는 그의 손엔 007가방(현금)이 들려져 있다.
양유진(48ㆍ여) 실장의 일은 은밀하고 비밀스럽다. 그래서 '보안 유지'는 생명과도 같다. 만나는 이들의 가족관계와 재테크는 물론이고 취미, 걱정거리까지 꿰뚫고 있다. 그의 직업은 뭘까. 국가정보원이나 비밀요원? 기술한 대로만 생각한다면 무리도 아니지만 그는 비밀요원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고액 자산가들의 쇼핑을 책임져 주는 퍼스널 쇼퍼(personnal shopper)다. 2004년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퍼스널 쇼퍼 제도를 도입했을 때 첫 발을 디뎠으니 국내 1호다.
현재 그의 일터는 서울 소공동 롯데 백화점 애비뉴얼 명품관 5층에 자리잡은 퍼스널 쇼퍼 룸. 명품 고객 중에서도 최상위층인 VVIP(멤버스클럽)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가 맡고 있는 고객은 VVIP 고객 250명 중 50여명. 씀씀이가 연간 10억원은 훌쩍 넘는 알짜 고객들이다.
요즘 구매액 상위 고객들의 매출액 기여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퍼스널 쇼퍼의 역할도 막중해지고 있다. 이러다 보니 그의 업무는 고객들의 패션 취향을 미리 파악해 1대 1로 코디네이팅 해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고객들이 선물을 준비할 때 아이템을 골라주는 '기프트 서비스', 연극이나 영화를 추천하고 예매해주는 서비스, 고객들의 세금문제나 재테크 고민을 해결해 주는 '재테크 서비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객들의 수족이 되는 셈이다.
때로는 바깥 출입을 극히 자제하는 유명인들을 위해 직접 명품을 들고 집으로 가기도 한다. 그가 비밀요원처럼 비쳐지는 것도 고객들을 위해 준비한 수억원대의 명품을 은밀히(?) 배달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퍼스널 쇼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명품'. 일반인들은 평생가도 구경하기 힘든 명품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접하니 퍼스널 쇼퍼는 뭇 여성들이 선망하는 직업이다. 하지만 양 실장은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그는 "외부 강의를 나가 보면 퍼스널 쇼퍼 지망생들이 의외로 많다"며 "퍼스널 쇼퍼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실상은 막노동에 가깝다"고 조언했다.
그가 고객 한 사람에게 투여하는 시간은 대략 6~7시간. 고객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매장에서 찾아 룸에 배치하는 데 3시간, 얼굴을 맞대고 제품을 설명하는 데 또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매장 1~5층을 수 십번씩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건 기본이다. 이러다 보니 최근 다리에 통증이 생겨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 하고 있다. "명품에 대한 지식과 열정이요? 그거 건강이 좋지 않으면 다 부질 없습니다." 그가 퍼스널 쇼퍼의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강한 체력을 뽑는 이유다.
또 대부분의 고객이 눈높이가 높고 예민해서 마음에 드는 상품을 골라 주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온갖 불만이 제기되는 것도 애로사항이다. 한 예로 그는 고객 대상 문화행사를 할 때면 특정 테이블에만 앉아 있지 않는다. 그는 "특정 좌석에 앉으면 '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냐. 왜 그쪽에만 앉아 있느냐'는 불평과 불만이 제기되기 일쑤"라며 "명품 고객들은 항상 최고의 서비스를 원하기 때문에 차별 당한다는 느낌을 줘선 절대 안 된다"고 귀띔했다.
패션 트렌드를 따라가는 일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매달 나오는 4개의 명품잡지는 그에게 참고서다. 틈나는 대로 읽고 메모를 하기 때문에 잡지는 일주일이면 너덜거린다. 이러다 보니 머릿 속에는 항상 명품들이 맴돈다. 그가 꿰고 있는 명품만 해도 루이비통, 샤넬, 구찌, 페라가모, 불가리 등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브랜드에서부터 최근 젊은 층에서 관심이 높아지는 마크 제이콥스, 키톤, 쇼메, 닐바렛, 삐에르 발만, 바바라 브이 등 300개가 넘는다.
양 실장은 퍼스널 쇼퍼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로 '경청'을 꼽는다. 명품 고객들은 젊은 시절 피땀 흘려 부를 쌓았지만, 그만큼 청춘에 대한 보상심리와 걱정이 많아, 얘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그는 "고객들이 가족들에게도 말 못할 고민을 늘어놓을 때는 화들짝 놀란다"며 "퍼스널 쇼퍼는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인생의 동반처럼 살갑고 친근한 존재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양 실장은 퍼스널 쇼퍼를 접고 나면 하고 싶은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퍼스널 쇼퍼 지망생을 위한 책을 집필하는 일. 시중에는 이미 명품에 관한 책이 나와 있지만 그가 보기엔 실무자에게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또 한가지는 명품 고객들과 자선 단체를 만드는 일이다. 고객들이 누군가를 돕고 싶은데 구체적인 방법을 몰라 망설이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부유층은 돈만 기부하는 것보다 실제로 을英갠옜?참여하길 원합니다. 서로 신뢰가 쌓인 만큼 자선단체를 만들면 십시일반으로 돕겠다는 분들이 많아요. 이런 게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아닌가 싶어요."
■ 퍼스널 쇼퍼가 되기 위한 자질 5계명
1. 튼튼한 다리 (하루 7~8시간 매장을 돌아다니는 것은 기본)
2. 무거운 입 (명품 고객은 외부로 노출되는 걸 극히 꺼림)
3. 뻥뚫린 귀 (경쟁의식이 강해 친구에게도 안 하는 말을 종종 함. 말을 잘 들어주는 게 성공의 지름길)
4. 스피드는 기본 (국내 출시된 400여개의 명품 브랜드의 신상품은 모두 꿰고 있어야)
5. 친화력 (인간적으로 친해져야 고객이 원하는 걸 제대로 할 수 있음)
안형영 기자 truestor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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