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의 협상에 대해 다소 안이한 판단을 하는 것 같다." 지난해 북한 핵 시설의 가동중단과 불능화가 진전되고 있을 때 한국의 한 고위 외교관이 북핵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두고 한 말이다. 불능화 성과에 고무된 힐 차관보가 주로 북핵 해결의 낙관적 전망을 언론에 쏟아내던 시기였으니 이런 평가가 나올 만도 했다.
■ 북을 '안이하게' 본 힐 차관보
당시 노무현 정부 하에서는 우리의 어떤 '충고'도 실제로 힐 차관보에게 건네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 정부가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전체 맥락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초보 단계인 불능화 등의 의미를 한껏 부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이 한국전쟁의 종전 선언을 위한 남ㆍ북ㆍ미ㆍ중 4개국 정상회담이 금방이라도 성사될 것 같은 기대감을 퍼뜨리는 등 미국보다 우리가 '한술 더 뜬'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로부터 불과 5, 6개월이 지난 지금 북핵 문제의 현실을 점검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북핵 신고 지연으로 6자회담의 모멘텀이 약해지고 있고 북한은 한국의 새 정부에 노골적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서해에서 미사일을 실험 발사해 긴장을 조성했다.
힐 차관보가 이 같은 국면의 변화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로서도 무작정 북한에 끌려 다니기만 할 수는 없는 결단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 만큼은 분명해졌다.
힐 차관보는 최근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에서 행한 강연에서 "300일 정도 남은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 임기 내에 북핵 폐기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북한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대체로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현실의 모든 요소를 담은 아주 정확한 진단으로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미국이 북핵 문제를 부시 행정부의 유일한 외교업적으로 유지하는 일에 집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북한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 한국은 6자회담 감시도 해야
물론 당장 내일이라도 북한이 태도를 바꿔 북핵 해결에 속도가 붙으면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등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의무사항도 조속히 이행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단지 부시 대통령 재임 중 업적에 대한 고려에서 '어떻게 해서든 북한을 달래야 한다'는 수세적 입장이 6자회담의 토대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북한에 대한 제재나 압박은 최후의 수단이 돼야 하지만 이러한 카드를 아예 쓸 수 없는 것으로 못박아 놓는 것은 6자회담의 장래에 득보다 실을 더 많이 안기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내달 중순으로 예정된 캠프 데이비드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유명환 외교장관이 지난 주 워싱턴을 다녀갔다. 한국의 새 정부와 미국이 북핵 대처를 놓고 본격 조율을 해야 하겠지만 돌이켜보면 노 전 대통령 정부 하에서는 북핵 문제에 관해 '한국의 외교'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북한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로 미국에 좀더 많은 양보를 주문한 것이 한국 외교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이러한 자세도 바뀌어야 한다. 새 정부 들어 한미동맹의 복원이 얘기되고 있지만 단순한 복원만으로는 미 정권교체기에 우리의 국익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다. 한국은 6자회담에서 미국의 협력자이지만 때로는 감시자 역할도 해야 할 것이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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